[박주원 장편소살]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막 (14)
[박주원 장편소살]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막 (14)
  • 경남일보
  • 승인 2015.10.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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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우먼파워’ 회원들 모두 어머니 성을 같이 쓴다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아버지의 이해를 도우는 것이 순리일 것은 알지만 조근조근 친절하게 굴어 본적 없는 본성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말끝도 일부러 고향 말인 예, 예를 쓰지않고 반말처럼 들리는 서울 식 표준말로 요, 요를 썼다.

양지는 소리 나게 양은그릇을 드놓았다. 가용돈 한 닢 여퉈두지 못하게 씨를 말리는 가장이 있는 한 늘 가슴이 쓰리고 아리다는 어머니의 약값을 현금으로 부치는 것은 실수였다. 따지고 보면 문제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더 많은지 모른다. 신이며 주군이며 상전으로 아버지라면 끔뻑 죽는 어머니.

[실장님, 전화 받으시라니까요]

번쩍 정신을 차리자 눈앞으로 송수화기가 디밀어졌다. 벌써 몇 번이나 채근을 한 모양 하양의 웃음 띤 얼굴이 옆에 있었다.

[언니, 언니쟤?]

대뜸 귀를 푹 찌르는 느낌에 양지는 저도 몰래 송수화기를 귀에서 뗐다. 아아, 왜 이러지? 양지는 대답도 않은 채 책상 위로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송화구에서는 호남의 성급하게 들썩거리는 목소리가 쏟아 부은 공 구르듯이 굴러 나왔다. 양지는 물끄러미 송수화기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아이구 저 거꾸리. 덜렁 덜렁 짐을 싸들고 또 어디쯤 와 있다는 걸까. 양지는 도리질을 했다. 벗어 날 수 있다면 가족들 멀리 어디로든 도망을 가고 싶었다. 정말이었다. 성남언니는 그냥 보인 게 아니었다. 양지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기 무섭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덮쳐들어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눈을 떴다.

그러잖아도 아침에 떠나보낸 아버지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참이었다. 기백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하게 아버지는 부식되어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상대로 그 따위 감정 표출을 하다니. 앞에 놓인 저녁상을 둘러보고 건너오던 아버지의 어리뚱한 눈길이 망막에 맺혀있었다. 계란국, 계란찜, 계란후라이, 계란말이, 껍질째 삶아서 소복하게 담아 놓은 계란 양재기……. 계란 반찬 일색인 상을 둘러보다가 아버지가 그랬다. 뭘라꼬 이러키 여러 가지나 했노, 귀찮게시리. 성의를 봐서 억지로라도 다 먹어야할 의무감을 느낀 듯 바투 상 앞으로 다가앉은 아버지는 입가심으로 간장 한 숟가락을 떠 넣었을 때처럼 막상 빈 입맛만 쩝쩝 다실 뿐 어느 그릇에도 얼른 숟가락을 대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양지는 고스란히 남다시피 한 계란반찬들을 쓰레기통에 쓸어 넣으면서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자라서 내 손으로 돈 벌면 달걀을 얼마든지 사 먹을 거라며 눈물지었던 어린 딸의 옹골진 자기 맹세를 아버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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