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 (17)
지난날들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잊어버리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산 너머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처럼 주체 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어느 으스름한 달밤, 뒤뜰의 두엄 밭에서 아이를 낳던 어머니의 피 흘리는 자궁이 한정 없이 크게 확대되었다.
아버지가 소원 성취했단다. 아들만 셋이나 낳은 과수댁인데 천 오 백만 원 주기로 하고.
호남의 어투를 받아 거듭 곱새겨 보았지만 얼른 현실감이 닿지 않았다. 뇌수가 굳어버린 듯 더 이상의 사고력이 뻗어나지를 않았다. 환갑노인과 핏덩이 아들. 환갑노인과 핏덩이 아들. 그리고 자력으로는 땡전 한 닢 마련할 수 없는 아버지가 씨내리 값으로 약속했다는 천 오 백만 원.
“영감탕구가 망령이지 글쎄, 나 죽는 꼴 볼라꼬 주영이 아부지한테 사무실로 돈 꾸러왔더라 안 카나. 산부인과 병원비 말이다”
그제야 하루 종일 짓누르고 있던, 아버지의 느닷없는 방문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교통비 이외의 용돈을 받아들고도 할 말이 남은 듯 딸막거리던 입술에 대한 짠함도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절박한 심정을 담고 매정한 딸자식의 눈치를 보며 따라다녔을 외눈의 애소…….
양지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세면기의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에다 손을 담그자 손가락 끝으로 냉기가 파고들었다. 퉁퉁 부은 다친 눈을 싸매고 때린 송가 놈들을 찾아 사흘간이나 헤맸단다. 내가 와 쏙도 없는 인간 맹키로 너그 아부지한테 죽어지내는지 아나? 세(勢) 없고 돈 없는 설음으로 이를 갈 때는 당장 몇 도라꾸 군사라도 낳아서 너거 아부지한테 앵기주고 싶었제. 남 보기 숭한데 남으 눈이라도 해옇자꼬 노래로 삼았건만 이녘 아들이 원수 갚아주기 전에는 가망 없다꼬 뻗댄 고집이다.
양지는 거퍼 얼굴에다 물을 끼얹었다. 엄마, 엄마.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입속에다 물을 퍼 넣었다. 고개는 일부러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바로 거기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에는 제일 먼저 코가 드러나 보일 것이었다. 쾌남이 코는 영판 지 에미 코 빼다 박았어. 양지는 번쩍 고개를 들고 거울 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성남어매는 다 좋은데 코가 너무 날람해. 코끝이 저리 날람한 사람 치고 순탄하기 사는 사람 못 봤어. 양지는 손을 씻던 비누를 거울에다 북북 문질렀다. 뽀얗고 두텁게 비누가 갈리는 동안 일그러졌던 거울 속의 얼굴은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누군가 화장실의 문을 두드리며 발을 구를 때까지 양지는 멈추지 않고 비누를 문질러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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