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 (1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 (19)
  • 경남일보
  • 승인 2015.11.0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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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 (19)

양지는 반사적으로 맞은편의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퇴근 시간은 아직 일렀다. 사장과 동행해야할 공식적인 일은 없었다. 그 순간 어제 미루었던 명자언니와의 만남이 뇌리를 스쳤다.

"저 오늘 약속이 있는 데요"

"그 약속은 하루쯤 미뤄. 급한 것부터 우선이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이며 사장 스스로 양지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양지는 내심 사장의 그런 단호함을 기대하고 있었던 듯 한 감을 의식하며 사장이 하는 대로 끌려 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호남의 전화 때문에 받은 충격을 위안 받기 위해서도 찾아 갈 곳은 거기 명자언니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변에 삼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부터 명자언니는 사람이 달라졌다.

누대의 해묵은 앙원이 풀리는 길이라며 명자언니는 들떠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가했던 박해를 알고 있는 양지로서는 스스로 위해를 가한 적은 없지만 가해자 취급을 당해야 되는 형용할 수 없는 꺼림칙함을 안고 지내야했다. 이제 와서 누가 적손이며 지손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양지의 부정에도 아랑곳없이 명자의 목소리에 끼어있는 냉정함과 비아냥거림은 가시방석처럼 양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발뺌을 해보았자 너도 최 씨 성을 쓰며 이제까지 최 씨 행세를 하고 있지않느냐는 말을 명자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 동안 감춰두었던 자신이 극복하지 못했던 양지의 고학력에 대한 열등감도 적대감의 묘한 표적이 됐다. 어떻게든 연변에 생존해 있는 삼촌을 모셔와 양지네와 얽혀있던 양가집 역사를 한번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 명자의 목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칠 것 없어진 재력으로 상대를 무릎 꿇리는 장한 모습을 삼촌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리도 간파되는 대목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 동안의 일은 내가 사과할게, 한 마디만 해버리면 둘 사이의 화해는 너무 싱겁게 완성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명자언니의 부름에 호락호락 응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미스 김은 같이 안 가요?"

저녁 식사와 맥주 한 잔, 뭐 그런 자리를 예상한 양지는 사장실 입구에 있는 미스 김의 비어있는 자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염려 마, 걘 어제 같이 갔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미스 김은 새우 요리를 좋아한다지만 난 아니니까. 자신 보다 미스 김을 먼저 챙겼다니 약간 언짢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딴 서운함을 속 좁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층계를 가쁜 가쁜 내려가는 사장에게서는 피아노 음향처럼 경쾌한 향기가 났다. 은근히 달착지근하다가 톡 쏘는 듯.

"사장님 향수 또 바꾸셨나봐요?"

"어머나, 최 실장도 여자는 여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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