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주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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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5.11.0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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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이승기
“결혼이란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오래된 사회제도의 하나로서…(중략)…결혼의 보편적인 형태인 일부일처제는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본다.” 이문열의 소설 ‘레테의 연가’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혼례’라 하여 서로에게 예를 갖추고 동방화촉을 밝히는 엄격하고 정중한 백년가약의 예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통혼례는 드물게 볼 수 있고, 서양의 결혼식 모습을 받아들인 소위 신식 결혼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화려한 예식장, 새하얀 드레스의 신부, 그리고 엄숙한 주례사…. 신식 결혼식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주례를 하게 된 것은 불혹의 나이로 접어든 해였다. 주례를 맡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였는데, 당시 주례로 활발히 활동하던 지인이 어느 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나에게 대신 주례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 예식장에 섰을 때가 기억난다. 하객 가운데를 지나서 단상으로 걸어가는데 영롱한 샹들리에 불빛, 신랑 친구들이 터뜨리는 플래시, 입추의 여지없이 모인 하객 등. 도대체 어떻게 진행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다음날 아침에 거울을 보니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다.

주례는 결혼식을 진행하며 성혼선언으로 새로운 부부가 탄생했음을 선포하고, 그들의 앞날을 위한 조언과 덕담을 담은 주례사를 한다. 주례를 모실 때는 평소 신랑·신부나 혼주와 인간관계가 있는 분 중에서 청하는 것이 기본이나 여의치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예식장에서는 그런 경우를 대비해 주례를 전문으로 하는 선생님을 몇 분씩 모셔놓고 있다.

필자가 주례를 하면서 지키는 원칙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례사는 5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전 국문학의 태두 이숭녕 박사의 칼럼에서 주례사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5분을 초과하면 잔소리가 되니 그 안에 끝내라고 하신 말씀을 읽었다.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간략하고 의미 있는 주례사를 남기고자 노력했다.

결혼식도 트렌드가 바뀌어 친구들의 축하 이벤트나 웨딩 촬영의 비중이 점점 커져가더니 어느 순간 주례 없는 예식이 등장했다. 시대의 흐름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데, 어쨌거나 아직까지 나의 주례사에 맞춰 새 출발을 하는 신랑·신부가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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