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위대한 유산
  • 경남일보
  • 승인 2015.11.1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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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이승기
초가삼간 흙마당에 방공호가 파여져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날, 찌푸린 하늘 아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그곳으로 긴급히 대피하곤 했다. 얼마 후 그곳을 돌멩이로 메운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그 작업이 해방 때문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일제강점기 시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근무하던 선친께서는 광복 이듬해 갑자기 각혈을 하고 병석에 누우셨다. 어려운 생활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의약품도 변변찮던 시절이라 제대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선친께서는 운명하기 전 유언으로 고리짝 가득한 책을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청상과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셨다. 봄이면 부잣집 일감을 받아 명주바지, 저고릿감을 홍두깨에 감아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만들어주고 그 대가로 쌀이나 보리쌀을 받아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그나마 늘상 있는 일이 아니라서 보릿고개의 무서움을 이때 알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육군상이용사병원에서 급사 노릇을 하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마산에서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책 보는 재미가 붙었는데, 김래성의 ‘마인’, 김말봉의 ‘찔레꽃’, 방인근의 ‘새벽길’이 그 출발이었다.

수년 후 고향에 가 선친의 유품이 보관돼 있던 외갓집을 들렀다. 헛간에 있던 고리짝은 빗물에 젖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열어보니 책도 거의 없었는데, 예전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은사께서 대부분 가지고 떠나셨다 한다. 남은 건 작은 문고판 서적 다섯 권뿐이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편찬한 ‘역대시조선’을 펼쳐보니 붓두껍으로 도장을 찍어 놓은 시조가 수십 편 있다. 아마 선친께서 암송한 시조일 것이다. 선왕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수양산에서 죽어간 백이·숙제를 기린 ‘수양산/바라보며/이제를/한하노라’는 도장이 두 번 찍혀 있다. 선친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시조를 읽으셨는지 이젠 물어볼 길이 없다.

올 추석에 고교 3학년인 둘째 손자에게 선친이 남신 책 중 한 권을 선물했다. 1932년에 발간된 일본어판 영어교과서인데 선친의 서명과 날인이 적혀 있다. 귀중한 유품이니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자식에게 천금보다 귀한 책을 물려주신 선친의 위대한 정신이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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