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초가삼간 흙마당에 방공호가 파여져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날, 찌푸린 하늘 아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그곳으로 긴급히 대피하곤 했다. 얼마 후 그곳을 돌멩이로 메운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그 작업이 해방 때문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일제강점기 시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근무하던 선친께서는 광복 이듬해 갑자기 각혈을 하고 병석에 누우셨다. 어려운 생활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의약품도 변변찮던 시절이라 제대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선친께서는 운명하기 전 유언으로 고리짝 가득한 책을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청상과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셨다. 봄이면 부잣집 일감을 받아 명주바지, 저고릿감을 홍두깨에 감아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만들어주고 그 대가로 쌀이나 보리쌀을 받아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그나마 늘상 있는 일이 아니라서 보릿고개의 무서움을 이때 알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육군상이용사병원에서 급사 노릇을 하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마산에서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책 보는 재미가 붙었는데, 김래성의 ‘마인’, 김말봉의 ‘찔레꽃’, 방인근의 ‘새벽길’이 그 출발이었다.
수년 후 고향에 가 선친의 유품이 보관돼 있던 외갓집을 들렀다. 헛간에 있던 고리짝은 빗물에 젖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열어보니 책도 거의 없었는데, 예전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은사께서 대부분 가지고 떠나셨다 한다. 남은 건 작은 문고판 서적 다섯 권뿐이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편찬한 ‘역대시조선’을 펼쳐보니 붓두껍으로 도장을 찍어 놓은 시조가 수십 편 있다. 아마 선친께서 암송한 시조일 것이다. 선왕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수양산에서 죽어간 백이·숙제를 기린 ‘수양산/바라보며/이제를/한하노라’는 도장이 두 번 찍혀 있다. 선친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시조를 읽으셨는지 이젠 물어볼 길이 없다.
올 추석에 고교 3학년인 둘째 손자에게 선친이 남신 책 중 한 권을 선물했다. 1932년에 발간된 일본어판 영어교과서인데 선친의 서명과 날인이 적혀 있다. 귀중한 유품이니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자식에게 천금보다 귀한 책을 물려주신 선친의 위대한 정신이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일제강점기 시대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근무하던 선친께서는 광복 이듬해 갑자기 각혈을 하고 병석에 누우셨다. 어려운 생활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의약품도 변변찮던 시절이라 제대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선친께서는 운명하기 전 유언으로 고리짝 가득한 책을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청상과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셨다. 봄이면 부잣집 일감을 받아 명주바지, 저고릿감을 홍두깨에 감아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만들어주고 그 대가로 쌀이나 보리쌀을 받아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그나마 늘상 있는 일이 아니라서 보릿고개의 무서움을 이때 알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고 육군상이용사병원에서 급사 노릇을 하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마산에서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책 보는 재미가 붙었는데, 김래성의 ‘마인’, 김말봉의 ‘찔레꽃’, 방인근의 ‘새벽길’이 그 출발이었다.
수년 후 고향에 가 선친의 유품이 보관돼 있던 외갓집을 들렀다. 헛간에 있던 고리짝은 빗물에 젖어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열어보니 책도 거의 없었는데, 예전에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은사께서 대부분 가지고 떠나셨다 한다. 남은 건 작은 문고판 서적 다섯 권뿐이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 편찬한 ‘역대시조선’을 펼쳐보니 붓두껍으로 도장을 찍어 놓은 시조가 수십 편 있다. 아마 선친께서 암송한 시조일 것이다. 선왕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수양산에서 죽어간 백이·숙제를 기린 ‘수양산/바라보며/이제를/한하노라’는 도장이 두 번 찍혀 있다. 선친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시조를 읽으셨는지 이젠 물어볼 길이 없다.
올 추석에 고교 3학년인 둘째 손자에게 선친이 남신 책 중 한 권을 선물했다. 1932년에 발간된 일본어판 영어교과서인데 선친의 서명과 날인이 적혀 있다. 귀중한 유품이니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자식에게 천금보다 귀한 책을 물려주신 선친의 위대한 정신이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화자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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