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맹구 선생, 순국 72년 만에 독립운동가 인정
박맹구 선생, 순국 72년 만에 독립운동가 인정
  • 허평세 기자
  • 승인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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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독립운동하다 옥사 '제2의 유관순'
일제강점기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체포돼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7세를 일기로 숨진 통영 출신 박맹두 선생이 순국한지 72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7일 순국선열의날을 맞아 박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

1926년 통영군 동부면 다포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통영초등학교 전신인 통영제1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통영군 통영읍 광도온망조합(현 기선권현망수협)에 취직을 했다. 박 선생은 그때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이순신장군의 정신을 본받자’는 등 내용이 담긴 벽보를 써붙이고 삐라를 만들어 돌리는 등 소년 독립운동가로 성장해갔다. 박 선생은 15세 때인 1941년말 광도온망조합 창고 벽에 먹으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다가 잠복근무중이던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 붙잡혔다. 그는 1942년 3월 부산지검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 장기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6세에 불과한 소년이 이런 중형을 선고받은 것은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배후를 말하지 않았고 재판부가 ‘개전의 정’조차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유가족들이 증언했다. 박 선생은 부산에서 인천 학익동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돼 복역하던 중 1943년 1월 23일 숨지고 말았다. 유가족들은 그가 취조과정에서 가해진 갖은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유가족들은 그의 유골을 인수해 고향인 정량리 뒷산에 뿌렸다. 통영에서는 이후 한동안 박 선생을 ‘제2의 유관순’으로 부르며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도 했다. 이번 독립유공자 선정을 계기로 박 선생의 순국열사 비문 건립사업 등이 본격 추진될 전망이다.

박 선생의 동생 봉규(77·서울 서초구)씨는 포상유공자 신청서에서 “형이 통영에서 부산으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면회를 시도했으나 당시 형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었고 일제 당국이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형이 면회가 안 되면 물에 빠져죽겠다고 항의해 면회가 이뤄졌으며 그때 형의 모습은 고문 등으로 참담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고 증언했다.

박 선생에 관한 증거 자료 등을 수집하고 독립유공자 신청도 제안한 경상대 박철규(54) 박사는 “축하할 일이다. 다만 유공자 신청 전이라도 국가가 적극 유공자 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허평세기자·일부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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