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선비의 문중계승
경남 선비의 문중계승
  • 경남일보
  • 승인 2015.12.2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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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 사서)
이정희
근래 시제에 참석해 보면 어르신들의 푸념이 쏟아진다. 제관과 제수를 준비하는 사람은 온통 늙은이뿐이니, 앞으로 제사 지낼 일이 걱정이기 때문이다. 시제는 일 년에 한번 후손이 모여 조상을 추념하는 날이다. 조상을 추념하는 방법에는 제사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각포 이제권과 혜산 이상규 부자의 경우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각포공 문중의 드러난 인물인 매촌 이인형과 성재 이령은 점필재, 김종직과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조선 초기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갑자사화 때 무오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구명을 주도한 것이 문제가 돼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후 매촌은 신원됐으나 성재는 끝내 신원되지 못했다. 이후로 후손들은 고성, 진주, 함안, 거제로 각각 흩어져 낙향함으로써 벼슬과 학문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각포공은 한미해진 문중을 부흥시키고자 백방의 노력을 경주했다. 먼저 두 아들을 김해부사로 부임한 성재 허전의 문하에 보내 배우게 했다. 아들의 학문이 어느 정도 숙성되자 성재의 제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산청으로 이주를 결심하고, 1880년 고성 무양리에서 단성 묵곡리로 옮겨 왔다. 그러나 정착 후 1년 만에 각포공은 별세하고, 세 아들 중 첫째와 셋째도 요절하고 말았다. 각포공의 유업 계승책임은 둘째아들 혜산에게 있게 됐다.

혜산은 문중의 학문 번성을 위해 1902년 장학기금 마련과 학계(學契)를 조직했다. 후손들을 교육시킬 ‘학이재(學而齋)’를 건립하고 서적도 구입 비치했다. 또 1911년에는 한자 및 역사교재인 ‘역대천자문’을 편찬하고, 족보도 간행했다. 1913년에는 문중 재실인 ‘한천정(寒泉亭)’을 건립했다. 혜산은 마지막으로 후손들이 조상들의 연고지를 떠나와 살고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조상의 행실과 유적을 쉬 잊어버리고 돌보지 않을 것을 염려해 1924년에는 ‘혜산지감록(惠山志感錄)’을 간행했다.

이 책은 혜산이 조상 94명의 유적지를 방문해 행적을 기록하고, 자신의 감회를 읊은 시 140여 수를 붙여 간행한 것이다. 혜산이 그랬던 것처럼, 문중의 역사를 연구해 책으로 엮어 젊은이에게 잘 교육하는 것도 조상 추념의 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야만 시제에 젊은이의 동참이 있게 될 것이다. 이정희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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