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문학의 백미, 남명의 ‘유두류록(遊頭流錄)’
등산문학의 백미, 남명의 ‘유두류록(遊頭流錄)’
  • 경남일보
  • 승인 2016.01.0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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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 사서)
이정희
조선 초기 영남 선비들 사이에 등산 붐이 일었다. 점필재 김종직, 탁영 김일손, 남명 조식 등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경쟁적으로 지리산에 올랐다. 등산을 마친 뒤에는 기행문을 작성해 벗에게 보이고 문집에도 수록했다. 기행문은 등산 경험자에게 노년의 비망록으로, 등산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안내서로, 산에 오르지 못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와유(臥遊)의 자료가 됐다.

등산문학은 아득한 고대에도 있었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는 명언을 남겼고, 당나라 유종원은 유람 중 본 경물을 섬세하게 묘사한 기록을 남겼다. 송대 유학자는 산을 유람하면서 학문의 이치를 논하기도 했다. 중국의 등산문학은 ‘유기(遊記)’ 또는 ‘소품문(小品文)’이라고 하여 유람자의 객관적인 견문만을 기록해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문학성이 부족하다. 그러나 영남 선비들의 기행문은 견문, 느낌 등을 섬세한 문장으로 기록했다.

지리산 사랑을 실천으로 옮긴 대표적인 인물은 남명이다. 그는 58세 되던 1558년 4월 10일부터 17일간 지리산 유람을 떠났다. 12번째 지리산 유람이다. 합천 삼가를 출발, 배를 타고 남해바다를 지나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와 신흥사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남명은 유람 도중 일두 정여창, 녹사 한유한, 조지서 부부의 유적을 차례로 방문해 그들의 충절과 절의를 확인했다. 남명에게 등산의 의미는 ‘산과 물을 구경하면서 인간과 세상을 돌아보는 것(看山看水 看人看世)’이었다. 남명은 그들이 처한 시대상황과 그들의 행적을 통해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했다. 남명은 결국 지리산 유람을 계기로 3년 후 천왕봉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산청 덕천강 곁에 터를 잡았다. 혼탁한 시대, 구차하게 벼슬에 나아가기보다 학문수양과 후학양성을 통해 앞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다.

남명의 기행문은 4700여자에 달한다. 남명의 ‘유두류록’은 우리나라 등산문학의 백미일 뿐만 아니라 남명 사상의 핵심이 무르녹아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주말마다 울긋불긋 등산복 입고 산을 찾는 현대인들은 산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느끼며, 또 돌아와서는 무엇을 남기는지 궁금하다.
이정희 (경상대학교 도서관 문천각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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