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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플러스 <141>서북산평양 출신 종군기자가 보았던 그 남해바다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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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10  16: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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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남정맥길 마당바위

‘바다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 진해만을 발아래 굽어가며 마산을 지척에 둔 남쪽하늘 한끝, 푸른 바닷가의 서북산 700m고지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동무들과 같이 진중에 있다. 바윗돌을 파내고 솔가지를 덮은 은폐호에서, 저 멀리 서남쪽 통영반도의 산줄기가 굼실굼실 내다보이며, 정면에 활짝 트인 바다 한가운데 거제도가 보인다. 그리고 올숭달숭 물오리 떼처럼 흩어져 있는 조그만 섬들은 안개 속에 가물거린다.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바다….’

전쟁이 터졌다. 평양 출신 혁명적 로맨티스트 작가 김사량은 김일성 근위 6사단 일명 방호산부대에 배속돼 종군기자로 참전한다. 가장 먼저 휴전선을 넘은 그와 부대는 단숨에 여수·순천을 거쳐 하동까지 진격한다. 이들은 하동에서 채병덕장군을 무너뜨린 뒤, 진주를 거쳐 두달만인 8월 마산 서북산에 당도한다.

서북산 탈환 후 참호에 머물렀던 김사량은 마산 창포만을 내려다보며 승리를 예감한 것인지, 아름다움에 반한 것인지, 평양에 보낼 서북산 발 진중기사를 썼다. ‘바다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바다…,’

그러나 인민군은 서북산에서 진격을 멈췄다. 나라를 통째로 내줄 절체절명의 위기에 닥친 한미연합군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

이 산에는 미 25사단 5연대 중대장 로버트 티몬스 대위가 있었다. 하와이에 주둔하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방어선 사수를 위해 가장 먼저 서북산에 파병됐다. 66년 전, 젊은 군인 로버트 티몬스와 종군기자 김사량의 전장, 마산 서북산(738m)을 찾아간다.

 
   
▲ 평양출신 북한 종군기자가 서북산 참호속에서 봤던 남해 창포만 전경. 그는 이 바다를 보면서 승리를 예감한 것인지, 아름다운 바다에 감탄한 것인지 모를 종군기사를 썼다.


▲등산로, 1021지방도 옆 임도→전원주택→너덜겅→이정표→첫번째 능선 쉼터(상별래,법륜사 갈림길)→낙남정맥 주능선→약수터 갈림길→서북산 정상·전적비→감재고개→서북산농원→별천지 산장 마을→함안별천학생야영수련원→정지병 약수터 회귀.

▲이 산 들머리에 접근하기위해서는 79번도로를 타고 여항면사무소 뱡향으로 가야한다. 사무소 부근에서 1021지방도를 따라 대촌마을→정지병약수터 100m전에 있는 임도까지 가야한다.

오전 10시 10분, 전원주택(여항로 370-2)앞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오르면 산에서 흘러내려온 너들겅을 가로지르게 된다.

이 길은 군에서 조성한 여항산 둘레길 일부. 완만한 여항산 자락을 걸으면서 자연경관과 생태를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기존 샛길을 정비했다. 1구간 단풍길 7.7km, 2구간 소나무숲길 3.2km, 3구간 별내길 1km 중 마지막 4구간에 해당하는 2.1km, 치유의 길이다. 총 14km에 5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임도 옆 조망안내도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우뚝한 여항산, 오른쪽 낮은 곳에 좌촌·대촌마을 봉성저수지가 보인다.

임도 끝 왼쪽길이 본격적인 등산로. 산에 들면 소나무 절반이 쓰러져 있다. 한달 전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강하게 불었던 회오리풍이 많은 나무들을 통째로 부러뜨린 것이다. 피해가 컸던 것은 나무의 웃자람도 이유다.

오전 10시 44분, 벤치와 평상 등 휴식시설이 갖춰져 있는 첫 번째 능선에 올라선다. 넘어가면 상별래와 법륜사로 바로 가는 둘레길이다. 상별래는 별천의 다른 말로 외암초등 별천분교장이 있던 마을을 말한다. 지금은 별천학생야영수련원으로 바뀌었다. 서북산으로 가기위해선 둘레길과 헤어져 다시 오른쪽 능선을 타야 한다.

 
   
▲ 활엽목에 쫓겨 산능선에 올라온 소나무 군락


이때부터 심하게 가파르다. 오른쪽 산 마루금에 바위투성인 여항산의 비범한 산세가 도드라져 보인다.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여항산은 등산객을 매료시킨다.

오전 11시 44분, 두 번째 능선 즉, 낙남정맥 주능선 갈림길. 이정표는 ‘여항산 2km, 서북산 1.9km’를 가리킨다. 오른쪽은 여항산 방향, 왼쪽이 서북산·광려산 정맥 길이다. 정상에 마당바위라는 너럭이 있어 휴식하기에는 안성맞춤. 바위 수 천길 아래 아무 것도 없는 빈공간이다. 왼쪽에는 과거 봉홧불을 올렸던 봉화산이 마주하고 있다.

진행해야 할 서북산 줄기에는 소나무가 띠를 이루면서 자라고 있다. 전쟁 통에 불에 취약한 소나무가 몰살하고 능선에만 남은 듯 보였다. 이런 현상은 숲의 진화과정에서 발생하기도 하는데 세력이 강한 활엽수가 소나무를 능선으로 밀어 올려버려 발생한다. 약수터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통과한 뒤 낮 12시 32분, 서북산에 닿는다.

창원 마산합포구 진북면에 위치한 산으로 봉우리가 뾰족하고 사면이 급하다. 진북면의 서북단에 있다고 해서 서북산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적비. 화강암틀이 검은 오석 직 사각형비를 감싸 안은 형태다. 1995년 11월에 세웠다. 뒷면에 서북산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 중 낙동강 방어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월 미 25사단 5연대가 북괴군을 격퇴해 유엔군의 총반격이 가능케 했던 격전지이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티몬스대위 외 100여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 주한미군 8군 사령관 리차드 티몬스 중장과 제 9사단장 하재평 소장, 사단장병,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운다.’고 돼 있다. 전사한 티몬스대위의 아들 리차드 티몬스 중장이 1994년 8월 주한미군 8군사령관에 임명된 뒤 이듬해 아버지의 전장을 찾은 것이다.

당시 로버트 티몬스는 인민군이 장악한 서북산을 탈환하기 위해 참혹한 전투를 벌인다. 연합군은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인민군은 이를 뚫어야했다. 뺏고 뺏기는 살육전이 계속됐다. 산의 주인이 19번 바뀌었다. 한 달 반 동안의 처절한 격전은 보급로 차단과 화력에서 밀린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결국 아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 서북산 이정석과 전적비. 뒤에 뾰족한 산이 여항산이다.


하지만 국군 미군 경찰 민간인 수백명이 전사했다. 티몬스와 김사량도 이 전투가 끝이었다.

서북산이라는 한 공간에서 이념을 달리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북한의 종군기자 김사량은 글을 남겼고, 티몬스는 전적비를 남겼다.(김사량은 퇴각 후 서울 남한강 부근에서 사망)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실화가 있다. 승리한 미군이 이 산을 떠날 때 ‘갓뎀 마운틴’이라고 소리쳤다. 너무 많은 군인이 전사하고 진절머리가 나 신이 저주한 산이라고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지금도 이 산을 갓데미산으로 부르는 이유다.

그리고 바다가 보였다. 진정, 이 산에서는 당시 전쟁의 수렁에서 그들이 보았던 창포만이 보인다. 같은 바다였으되 두 사람에게 와닿는 의미는 극명하게 달랐을 것이다.

이정표는 대부산·봉화산 2.8km를 가리킨다. 감재방향으로 터벅터벅 길을 내려섰다. 등산로 옆에 크고 작은 구덩이가 눈에 보였다. 진달래도 피어 있었다. 지금 바다를 내려다 보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산을 걷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감재고개를 지나 오후 2시 40분, 서북산농원, 제일 산장, 별천지 산장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1027지방도가 끝나는 지점이다. 역방향으로 걸어서 이동하면 오후 3시 3분, 학교 함안별천학생야영수련원에 닿는다. 상별래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로, 과거 별천분교장이었으나 지역주민들이 ‘아이들의 꿈을 키운 학교였다’는 의미를 담아 보존하고 있다. 쉼터가 있는 정지병 약수터는 여행객의 목을 축여주는 샘물이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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