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살
주름살
  • 경남일보
  • 승인 2016.04.1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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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교실 강사)
손정란

언제였던가. 잠 머금은 이슬비가 내리던 한겻이었다. 검은 빛깔의 짙고 옅음으로 나타내는 사진들을 걸어놓고 보이는 진주 문화예술회관의 작은 방엘 갔었다. 아주 드물게 어디에 걸려 있더라도 보암보암 눈맛으로 보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진이 있다.

내 눈에 안경으로 깊수룸하게 사진들을 읽다가 어느 농부의 얼굴 앞에서 자국걸음을 멈추었다. 어깨가 구부정해 보이는 그는 가칫한 얼굴에 주름살을 모으며 웃고 있다. 아마도 써레질을 끝낸 자신의 논마지기 앞에 서 있거나 저물녘의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 싶다.

내풀로 넋이 올라 사진 속 농부의 삶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뜨겁고 각다분한 여름이 있고 풋풋한 봄도 있다. 서늘하고 능두는 가을이 있고 뒤란 처마 밑에 매달려서 얼었다 녹았다 하는 시래기처럼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겨울도 있다. 구푸리던 허리와 무릎, 잠시 기대던 등과 단단했던 몸을 이제는 느슨하게 놓는데 맺은 것만큼 주름살이 자글자글하다.

맏이로 태어나 갈치잠을 자면서도 달빛에 부푼 싹 돋우고 햇빛에 겹잎 불어나도록 바지런했다. 개막은 땅 감사납던 논밭은 늦가을 지붕 위에 박이 달리듯 오롱조롱한 자식들 그느르며 건몸 달게 살았다.

그루갈이로 농사짓다 한뉘 다 삭은 뒤에 무슨 볼일 있어 예까지 내달려 왔나. 올올이 힘줄을 풀어보니 노랑꽃 피는 일 없이 물기 배었던 젊음은 꼬들꼬들하게 말라가고 주름살만 한 바지게다. 돌아가는 모퉁이 길에 숨 고르며 손끝이 아리도록 켜켜이 눌러 담아 삭힌다.

연분홍 메꽃이 아침 나발을 분다. 올해는 봄비가 푸지게 내려 찔레꽃가뭄도 없었으니 모심기 무렵이면 무논에선 악머구리 울음소리가 들판을 감았다 풀었다 할는가.

잡을손으로 끝갈망 해놓은 농부의 걸음걸이는 느릿하다. 삽이거나 괭이 하나 들고 논틀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간다. 이쪽저쪽 산과 내를 두루 보며 흐름으로 걷는다. 지난 설에 와서 사나나달 사랑옵게 굴던 손주 녀석이 두고 간 세발자전거 옆으로 호박덩굴이 다옥하다.

수필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교실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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