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미의 적바림
그미의 적바림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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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강사)
손정란

밤새 도둑비가 다녀가셨는지 푸른 달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허리안개가 자옥한 앞산의 뻐꾸기 울음소리. 연초록이다. 움트는 것. 터져 나오는 것. 솟구쳐 오르는 것. 부풀어 오르는 것. 껍질을 벗는 것. 무엇이든 안에서 겉으로 드러내는 그 힘들.

그미는 삼백 예순 날을 산딸기나무의 뿌리를 들여다본다. 땀으로 가꾼 딸기밭에 농약을 쓰지 않으니 달개비, 바랭이, 씀바귀, 쇠비름, 괭이밥, 둑새풀이 우우 깃다. 저절로 나서 자라는 이 풀들은 골걷이하지 않으면 곱으로 번진다. 그미의 몸은 달력이 되고 시계가 되었다. 열손가락과 오금쟁이는 지치고 힘듦이 새겨졌다. 날마다 주인의 발그림자를 읽는 딸기나무는 천둥소리와 채찍비, 따가운 햇볕 속의 가뭄과 손돌이추위를 견뎌낸다.

“낼 이파리 게리로 오이소.”

서분서분한 그미는 밭머리쉼을 하는 틈틈이 딸기나무 옆옆이 말의 씨앗들을 뿌리고 가꾼다. 신선초, 당귀, 갬상추, 머위, 방풍, 우엉, 달래, 시금치. 쑥쑥 뽑거나 이들이들한 잎들을 삼박삼박 서너 소쿠리 베고 다듬어서 비닐봉다리가 미어지도록 넣어준다. 조금 무른 듯이 데쳐 한 줌씩 얼려 두었다가 갖가지 나물 반찬 오달지게 먹는다.

딸기밭은 상봉동 대롱골의 황새등 같은 봉우리에 있다. 조브장하고 가풀막진 내리받이에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지 말라고 우툴두툴하게 시멘트로 덮어 단단하게 다져 놓았다. 야무지게 지은 농막은 딸기밭 언저리에 저냥 앉아 있다. 지난 겨울 그미는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고 고구마와 밤을 구웠다.

실바람에 갸웃갸웃 고갯짓하는 하얀 딸기꽃송이들. 핀다는 것은 가만히 말없음이다. 어둠과 닫힘이 있고 숨김이 있다. 꽃이 피는 아픔은 길고 열매를 맺는 시간은 짧다고 했다. 꽃이 진 자리는 때 되면 귀한 과실로 돌아와 어거리풍년 되는 자리임을 믿는다.

무엇을 느끼거나 받아들이거나 헤아리며 해참까지 농막에 엎드려 어깻숨을 쉬며 지웠다가 또 쓰는, 그미의 시 적바림에는 뿌리 이야기가 담뿍하다. 그미는 마무새로 바람과 햇볕을 거둬들인다.

손정란 (수필가·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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