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순 (전 진주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 상담소장)
지난 5월 17일과 28일, 10일 간격으로 아까운 젊은 목숨 둘이 불의의 사고로 스러져갔다. 17일에는 서울 강남역 부근의 화장실에서 23세의 젊은 여성이 한 남성에 의해 무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건이 있었고, 28일에는 구의역 승강장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그 순간 들어온 전동차에 치여 생을 마감한 20세 청년의 죽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일어난 후 이어진 상황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들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잇과 국화로 애도의 공간을 만들고 피해자들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의 근본원인을 제기하는 장을 만든 것이다. 구의역 사고 빈소에는 엄마부대가 찾아가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애도과정을 보면서 그나마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발견한다. 피해자들과 공감하는 많은 일반 시민들이 이 사건들의 근본원인을 제기하고 그 해결을 위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본 것이다. 물론 정부는 여전히 임기응변적인 대책에 몰두하고 있고, 언론보도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문제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부분에서 찾기보다는 개인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지만, 일반 시민들이 만들어낸 애도의 장이 이러한 대응과 태도를 바꿔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된다.
여기서 강남역 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성이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묻지마 살인’에 희생된 것이지 여성이기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라며 ‘여성혐오’라는 이름을 붙여 피해자를 애도하는 것은 많은 선량한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일이라고 항변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항변은 피해자의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피해자들과 그들과 유사한 삶의 조건 속에 있는 잠재적 피해자들의 현재 상황을 은폐하는 발언이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살인’인 것은 가해자에게 있어서 피해 대상자가 ‘아무나’가 아니라 ‘여성 중 아무나’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여성혐오’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라는 말은 개개인의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아니라 남성들의 폭력적인 태도를 용인하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우리 문화에 대한 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라는 점에서, 이 원인은 구의역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윤을 위해서 파견직, 비정규직 직원을 양산하고 그들의 안전과 삶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차별의식이 구의역 사건의 근본원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피해자를 애도하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장을 외면하거나 폄하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야 만들어진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우리 사회가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 나가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 제발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 이야기를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해결책도 보일테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일어난 후 이어진 상황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들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잇과 국화로 애도의 공간을 만들고 피해자들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의 근본원인을 제기하는 장을 만든 것이다. 구의역 사고 빈소에는 엄마부대가 찾아가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애도과정을 보면서 그나마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발견한다. 피해자들과 공감하는 많은 일반 시민들이 이 사건들의 근본원인을 제기하고 그 해결을 위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본 것이다. 물론 정부는 여전히 임기응변적인 대책에 몰두하고 있고, 언론보도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문제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부분에서 찾기보다는 개인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지만, 일반 시민들이 만들어낸 애도의 장이 이러한 대응과 태도를 바꿔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된다.
여기서 강남역 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춰보면, ‘여성이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한 사람이 ‘묻지마 살인’에 희생된 것이지 여성이기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라며 ‘여성혐오’라는 이름을 붙여 피해자를 애도하는 것은 많은 선량한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일이라고 항변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항변은 피해자의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피해자들과 그들과 유사한 삶의 조건 속에 있는 잠재적 피해자들의 현재 상황을 은폐하는 발언이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살인’인 것은 가해자에게 있어서 피해 대상자가 ‘아무나’가 아니라 ‘여성 중 아무나’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여성혐오’이다. 따라서 ‘여성혐오’라는 말은 개개인의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아니라 남성들의 폭력적인 태도를 용인하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우리 문화에 대한 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라는 점에서, 이 원인은 구의역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윤을 위해서 파견직, 비정규직 직원을 양산하고 그들의 안전과 삶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차별의식이 구의역 사건의 근본원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피해자를 애도하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장을 외면하거나 폄하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야 만들어진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우리 사회가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 나가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 제발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 이야기를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해결책도 보일테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강문순 (전 진주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 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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