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 피카소, 해바라기와 님을 위한 행진곡
[경일포럼] 피카소, 해바라기와 님을 위한 행진곡
  • 경남일보
  • 승인 2016.06.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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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창원YMCA명예회장)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 혹은 궁궐의 기와지붕에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세워놓은 잡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잡상은 장식기와의 하나로서 지붕 추녀마루 위에 세워놓은 동물의 모양을 한 토우이다.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지붕에 잡상이 없으면 화재가 날 수도 있고 자연재해를 당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어처구니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한심해서 기가 막힐 때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을 한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일들이 있다.

55년 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해인 1962년에 14개비들이 ‘해바라기’라는 이름의 담배가 출시됐다. 그런데 해바라기가 구소련의 국화이고 14개비가 구소련의 14개 연방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10개월 만에 사라졌다. 1968년, 크레용 제조업체인 삼중화학공업사가 ‘피카소’라는 상표의 크레파스를 판매했다. 다음 해에 검찰은 피카소를 찬양하거나 그 이름을 광고 등에 이용하는 행위는 반공법 4조 1항(국외 공산계열의 동조 및 찬양, 고무) 위반이므로 강력히 규제한다는 방침을 발표, 제조업체 사장을 입건하고 ‘피카소’ 크레파스 광고를 중지시켰으며 몇 개월 후 크레파스 이름은 ‘피닉스’로 바뀌었다.

사실 피카소는 1944년 국제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소련으로부터 레닌평화상을 받았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예술활동을 공산주의 선전활동이라고 보았던 검찰은 예술계의 비판이 이어지자 파카소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므로 그의 예술을 순수하게 학문상으로 논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의 작품을 찬양하는 것은 고의가 인정될 때는 반공법에 저촉된다고 밝혔다. 한 걸음 양보한 것 같으면서 이현령비현령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었다.

잔인한 5월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서 합창은 되는데 제창은 안 된다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북한이 만든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됐고 북한의 ‘통일노래 100곡집’에 실려 있어서 안 된다고 한다. 심지어 노래제목의 님이 김일성을 가리킨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다. 노래는 1981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북한영화는 10년 뒤인 1991년에 만들어졌다. 노래를 만든 사람들이 10년 후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통일노래 100곡집’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실려 있다니 앞으로 이 노래도 합창은 되지만 제창은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옛말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하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일이긴 한데 분단병의 증세가 너무 심하다. 아무도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공산주의 선전활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피카소 크레파스를 사용하는 사람이 공산주의를 떠올리지도 않고, 해바라기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소련을 좋아할 사람도 없다.

남북분단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데올로기의 과잉과 경직성이다. 동무라는 단어조차 함부로 사용하면 어김없이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북한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만 해도 친북세력이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환자들이다. 나랑 생각이 다르거나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적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라면 중증환자인 셈이다. 흑백논리보다 총천연색의 다양한 사회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전점석 (창원YMCA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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