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9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97)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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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97)

그러나 만만치 않은 저항의 칼이 그녀의 혼미해지는 의식을 다시 휘저었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이 쾌락의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무가 된다. 그 동안 힘들여서 쌓아온 모든 것들.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단한 날을 위해 준비하고 걸어왔던 길.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심했지만 그 고통마저 감수해낸 저력의 밑바닥에는 그 대단한 날에 대한 찬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결코 이런 어물쩡한 과정을 통해 실수로 무화시켜서 안 되는 날이어야 한다. 이렇게 넌적스러운 순간을 위해 그토록 인내하고 고통을 참아왔던 게 아니었다. 그 대단한 무엇을 나는 꼭 성취해야 된다. 아직 때가 아니야!’

양지는 온몸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양지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현태에게 짓눌려 있는 몸을 비틀었다. 용수철처럼 몸을 퉁기며 발길질을 하는 순간 어딘가를 강타당한 듯 한 현태의 아, 하는 비명이 들렸다.

현태를 뿌리치고 일어난 양지는 맨발인 채로 무작정 뛰었다. 얼마간을 뛰다가 이름도 모르는 낯선 골목에서 강탈당할 뻔 한 귀중품을 고스란히 구해 온 듯이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그 후로 현태는 더욱 꺾으려는 순간에 놓쳐버린 저 높은 가지의 열매인양 양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맴을 돈다. 젊은 남자의 분출하는 욕정과 정복욕, 그 중 어느 하나이겠지만 양지는 때로 그 어느 것도 아닌 진정한 애정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내면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침윤의 파장이 깊어지기 전에 얼른 지워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 현태도 병훈도 모두 그녀의 인생 어느 부분에서 좀 색다르게 또는 심각하게 스쳐간 이름일 뿐이라고 양지는 마음의 비질을 해놓고 있었다.

낡은 기와집이 폐선의 잔해처럼 성긴 대나무밭 사이로 내려다 보였다. 긴 통나무로 눌러놓은 비닐막이 바람에 들썩거릴 때마다 위험하게 아슬아슬 지붕이 흔들려 보이기도 한다. 넘칠 듯 솟구쳐 오른 뜨거운 눈물 속으로 사당이 불타고 허물어진 터에 듬성듬성 남아있는 안채와 행랑, 조악하게 급조된 가축우리와 두엄간 따위의 어수선하고 쓸쓸한 모습이 어룽 빨려 들었다 멀어진다.

‘현태 씨, 현태 씨가 이 소나무나 저 바위, 아니 저 둥그런 고분의 흙무덤이었다면 나는 벌써 현태 씨에게로 쓰러졌을 거야. 나는 지금 너무 외로워. 겹쳐드는 액운에 몹시 지쳐있어. 의논하고 의지할 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해. 그게 현태 씨라면 아주 많이 든든할 거야. 하지만 현태 씨 그대가 남자의 정체성을 탈바꿈하지 못하는 한 나는 안 돼. 혼자 늙은 꼬부랑할망구가 되어 후회의 눈물을 흘릴망정 안 돼, 지금 이 기분, 이 형편으로는 더욱’

“여기서 뭐하고 있어?”

양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현태가 양지의 곁으로 와서 들여다보았다. 양지는 현태의 시선을 피해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담담한 음성을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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