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남명 선생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남명 선생
  • 경남일보
  • 승인 2016.07.1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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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시인·경남과학기술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 선비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남명매와 산천재.


◇조선의 선비, 남명 선생을 만나다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민심이 떠난 지 오래입니다. 높은 벼슬아치는 오직 재물에만 탐하여 나라가 썩어 들어가는 데도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왕대비는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만 갈래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형편을 바로잡는 길은 여러 가지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크게 한 번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남명 선생의 나이 55세 때 명종이 단성현감 벼슬을 내리자, 선생이 사절하며 임금께 올린 단성소의 줄거리다. 선생이 열아홉 살 되던 해 일어난 기묘사화, 개혁을 부르짖던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고 숙부의 멸문과 아버지의 좌천을 보며,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해 청빈하고 정의로운 선비가 될 것을 꿈꾼다. 벼슬을 진흙 구덩이라고 여긴 선생은 명종과 선조가 여러 번 벼슬자리를 건넸을 때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선비로서 일생을 고결하게 보낸다. 한평생 핍박받는 백성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는 삶이 남명 선생이 꿈꾸던 학문적 이상이고, 진정한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명 선생은 고향인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처가인 김해, 노년에 후학을 양성했던 산청 덕산, 이 세 곳을 벗어나지 않고 일생을 학문 정진에만 힘쓴 선비이다. 이번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은 남명 선생이 61세부터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학문과 후학 양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산천재를 비롯한 선생의 묘소, 남명기념관, 덕천서원, 세심정, 그리고 틈틈이 지친 심신을 씻기 위해 들렀던 백운계곡을 답사하면서 백성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생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가를 살펴보고, 그러한 삶을 본받아 진정한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힐링길을 나섰다.

 
▲ 덕천강이 내려다보이는 남명 선생 묘소.


◇남명 정신이 밴 세심정과 산천재

먼저 선생이 닦고 익힌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던 산천재부터 찾았다. 61세때 덕산에 와서 지은 집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전서체로 쓴 현판 글씨가 탐방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앞뜰에 선생이 직접 심은 매화나무(남명매)는 수령이 450년이나 되는데, 꽃이 만개하는 이른 봄이면 그윽한 매향을 찾아오는 상춘객들로 붐빈다. 산천재 3면 벽에 그려놓은 벽화에는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산 속에 은둔하며 세상사를 잊고 바둑을 두는 4명의 처사 그림과 쟁기로 밭을 갈면서 요순의 도를 즐기는 이윤의 그림,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받지 않고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며 영천에서 귀를 씻고 기산으로 은거했다는 허유의 귀 씻는 그림이 있는데, 남명의 은일(隱逸)사상을 함축해 놓은 듯해 세속에 물든 필자에게 큰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산천재 마당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선생으로 하여금 선비로서의 삶과 기개를 펼치게 한 스승이자 벗이 바로 하늘에 닿은 저 우뚝한 봉우리였음을 짐작하게 했다.

산천재 맞은편에 남명 탄생 500주년을 맞아 건립한 남명기념관이 있다.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품과 저서 등을 보관한 전시실, 선생의 석상, 제사를 지내는 가묘인 여재실 등이 있다. 특히 선생은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고,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의다’라고 ‘敬義’를 학문의 요체로 삼고, 그 실천궁행의 하나로 늘 몸에 칼과 방울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오롯이 기리기 위해 남명기념관을 세워 놓았다. 기념관에서 10여분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생의 묘소를 만난다. 무덤 좌우에 세워 놓은 망주석에 돋움새김을 해놓은 ‘세호(細虎)’가 무척 이채로웠다. 묘비에 새겨놓은 徵士(징사: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은 선비)라는 말을 떠올리며 조선시대 수많은 벼슬아치보다도 더 값진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숲길을 내려왔다.

산천재에서 1km 지리산 쪽으로 가면 덕천서원과 세심정(洗心亭)에 닿는다. 남명 선생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이러한 남명 선생의 덕행과 그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덕천서원을 지었다. 서원 앞 홍살문 곁에는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가 남명의 학풍을 이어받은 듯 당당한 모습으로 필자를 반겼고, 마당가에는 수령이 꽤 됐을 듯한 배롱나무 두 그루가 유생처럼 서 있었다. 제자들에게 강학을 한 곳을 ‘경의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보면 선생의 학문세계 요체가 무엇인지를 탐방객들에게 일깨워 주는 듯했다.

덕천서원 앞 덕천강 변에 운치 있게 선 세심정, 제자인 최영경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휴식처로 지은 정자다. 정자 옆 남명 시비에는 선생이 덕천강에 목욕한 뒤에 쓴 시 ‘욕천(浴川)’을 새겨 놓았는데, ‘온몸에 쌓인 40년간의 허물/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렸네/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오장에 생긴다면/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자리와 이름만을 탐낸 다른 벼슬아치와는 확연히 다른 고결한 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글이다.

 
▲ 백일홍이 피기 시작하는 덕천서원 모습.



◇갓끈을 씻은 백운계곡

산천재의 벽화 중 허유의 고사를 그려 놓은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은 청렴과 은일을 선비의 큰 미덕으로 여겼다. 틈틈이 물 맑은 계곡과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심신을 수양하고 시를 써서 발자취를 남기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백운계곡이다. 계곡 초입 영산펜션 간판 아래 바위에는 ‘龍門洞天(용문동천)’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다. 신선이 내려와 살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고 살기가 좋은 곳을 말하는 동천, 이 백운계곡을 세속에서 벗어나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상향으로 여겼던 모앙이다. ‘초사’의 어부편에 나오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을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탁영대(濯纓臺)는 선생이 실제 갓끈을 씻었던 곳으로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지와 고결한 삶을 염원한 선생의 뜻을 새겨 놓은 것 같았다. 계곡의 수많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맑은 물빛이 세속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필자의 귀를 깨끗하게 헹궈서 선생의 지고한 선비정신을 담아 가라는 훈육으로 들리는 듯했다.

박종현(시인·경남과학기술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 세심정 옆에 세워놓은 ‘욕천’ 시비
▲ 덕천강변에 세운 세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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