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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90)<150>경남문단에 최근 발표된 소설과 수필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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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28  2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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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지 수필가의 수필집 ‘장마 사이’에서 두 번째 <떠나지 않는 방랑시인>을 읽는 차례다. 수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노랫가락에 맞춰 시비로 다가갔다. 2월 하순의 녹녹치 않은 날씨 덕분에 다른 관람객이 거의 없어 눈치 보지 않고 흥을 내었다. 돌에 새겨진 한시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자로 된 시비 곁에는 풀이해 놓은 한글이 있어 이해하기가 좋았다. 한자로 된 시는 띄엄 띄엄 읽고 풀어놓은 한글은 꼼꼼하게 읽으며 배꼽을 잡았다.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버무려진 시들이 자유인으로 살고 간 시인의 삶을 대변해 주었다.

그 다음에는 묘소가 자리한 곳으로 방향을 바꾸었더니 난고 김병연의 기구한 생애를 소개한 글이 세워져 있었다. 병연은 1807년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지만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난에 연루되어 황해고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자랐다. 그후 모친과 함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내막을 몰랐던 병연은 스무살 때 영월도호부 향시에서 조부 김익순을 신랄하게 규탄한 글을 지어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죄책감으로 번민하다가 이곳 하동면으로 이주하였고, 그 일을 떨쳐버리지 못해 스물 두 살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다. 김삿갓은 전국을 유랑하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로 남겼다. 쉰 일곱에 전라도 화순에서 세상을 등졌고 몇 년 뒤 둘째 아들이 현재 묘소로 이장하였다 한다.

묘소에서 곡동천을 건너 자리한 문학관은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긴 김삿갓 시인의 문학세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번득이는 풍자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다. 천재였기에 방랑의 길만이 그를 살게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작가는 끝에다 “계곡 전체가 방랑을 대변하는 삿갓의 이미지로 덮여 있어 이제 시인은 어디로 떠나지 않고 노루목에만 머물러 있어도 될 것 같았다”고 적었다.

필자는 황작가의 수필을 읽으면서 김삿갓과의 인연이 새삼 떠올라 몇자 적고자 한다. 필자는 국제펜클럽 추천으로 영월군에서 시행하는 김삿갓문학상 운영위원장이 되어 6년간 문학상 시상에 참여한 바가 있다. 진주에서 영월까지는 직접 운전해 가는데 5시간이 걸렸다. 구마고속도로를 거치고 대구에서부터는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칠곡, 군위, 의성, 안동, 예천, 봉화를 지나면서 경북이라는 데는 가도 가도 경북땅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김삿갓의 피가 내 혈맥에 들어와 그의 삶과 시적인 방랑이 시작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필자도 김삿갓문학상을 받았고 필자의 시 <허공중에>가 문학관 곁에 있는 수상자 시비동산에 시비로 서 있게 되었다. 마침 시비는 영월에서 활동하는 산청출신 박찬갑 조각가의 조각으로 세워져 인연이라면 이도 인연이 아닌가 한다. 혹 영월 김삿갓면으로 문학기행을 갔을 때 누구든 시비동산에 들러 산청 냄새가 나는 시비가 어느 것인지 살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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