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0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04)
  • 경남일보
  • 승인 2016.07.28 20: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04)

비석 모듬이 있는 곳까지 와서 양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양지는 오른 쪽에 있는 비석 모듬을 향해 섰다. 논벌 가운데는 허물어진 팔각정자 터가 있다. 손님들과 연못의 금잉어를 희롱하며 시연회를 벌이던 선대들의 유적이다. 우아한 팔놀림으로 선조들의 위업인 비석 모듬을 자랑해 보이기에 계획적인 구도로 건물은 위치해 있었다. 낙엽과 쓰레기 나부랭이 사이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비석은 전보다 더 늘었다. 시호비, 하사비, 공덕비…….

그 중에는 학계에서 탁본을 해간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양지는 문맹도 아니면서 아직 비석에 각인 되어 있는 글씨 한자를 관심 있게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봄날, 죄 없이 받았던 빗자루 타작에 대한 억울한 분노가 터칠 곳 없이 아직도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양지는 그 날 감나무 밑에서 풀이파리를 뜯어서 김치를 담그고, 진흙으로 인절미를 만들며 제사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려진 제상에 어른들처럼 공손하게 절을 하고 냠냠냠 음복을 하는 것으로 놀이가 한 고개 넘으면 혼자 한 놀이는 막장에 이르러 졸음이 스르르 몰려온다. 이제 등에 업은 헝겊아기를 내려 뉘이고 젖을 먹이며 한숨 낮잠을 잘 차례다. 그 때 들에서 돌아 온 어머니가 끼고 있던 소쿠리와 호미를 집어던진 대신 부리나케 지게작대기를 주워들며 성남아 경남아 용남아 귀남아 딸들의 이름을 나오는 대로 죄 불러 젖혀놓고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손짓하는 어머니를 따라 양지도 뒤따라 뛰었다. 산토끼 잡는 몰이꾼들처럼 논길로 줄줄이 양지네 어이딸들이 뛰고 있는 모양을 무슨 신기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동네사람들이 내다보고 있었다. 얼마쯤 달리다보니 비석 모듬에서 쓰러진 비석과 씨름을 하며 낑낑대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쓰러진 비석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음을 한 눈으로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눈짓에 따라 딸들은 아버지가 끌어안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무게 중심을 못 잡고 있는 비석으로 엉켜 붙었다. 힘쓰는 요령이 없기도 하거니와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도 보탬이 되기는커녕 아버지의 움직임을 방해하며 거치적거리기만 했다. 마른 석이가 가시처럼 손을 찔러 앗 따거라 손을 뽑는 딸도 있어 힘의 안배마저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그러나 빨간 얼굴로 하얗게 잇바디를 악물며 딸들은 물러서지 않고 힘을 모았다. 거의 팔십도 쯤 비석이 바로 선 순간이었다. 이제 기단석의 홈에다 비신을 똑 바로 밀어 넣어야 했다. 그 찰나에 힘의 안배를 위해 조금 넓게 벌리는 아버지의 발에 양지의 작은 발이 밟혔고, 놀란 아버지의 움직임에 따라 걷잡을 수 없는 중력으로 빗돌의 중심이 어그러졌다. 아버지의 손을 떠나서 바닥으로 나둥그러진 비석은 여지없이 중동이 부러지고 말았다. 동강 난 비석을 바라 본 아버지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리던 절망과 낭패스러움이 증오의 불꽃으로 교차 된 것은 반짝 순간이었다.

“이 놈으 가시나들 뭐 할라꼬 와그르 끓어 나와갖고……, 내 이놈으 가시나들로 오늘 다 때리 쥑이고 말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