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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84)왕산자락 가락국천오백여년 버티고 선 구형왕 돌 능이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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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0  21: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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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능


한낮 기온이 37.5도라는 체온을 상회하는 살인적인 폭염이 계속되면서 피서 인파를 바다로 계곡으로 내몰고 있다. 어디를 가도 피서지마다 발 디딜 틈이 없는 북새통이라 일탈의 여유를 부려볼 만한 곳을 찾기가 싶지 않지만 그늘 짙은 수림 속에서 가락국의 옛 역사와 함께 시공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왕산자락이 있어 홀가분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35번 고속도로 생초요금소를 나와서 이내 좌회전해 임천강을 거슬러 오르면 고산준봉들이 사방으로 둘러싼 천혜의 요지에 강을 사이에 두고 산청군과 함양군이 어우러진다. 우회전해 임천강을 건너면 함양군 휴천면의 용유담을 거쳐 마천으로 이어지는 ‘천왕봉로’이고 좌회전해 특리 고갯길을 넘으면 산청 한방테마파크로 이어지는 ‘동의보감로’이다. 동의보감로를 따라 특리 고갯길 들머리에 접어들면 홍살문을 앞세우고 고래등같은 십여 채의 기와집들이 종횡으로 가지런히 어우러져 작은 궁전을 이루고 있다. 가락국의 10대왕 구형왕인 양왕의 별궁이라 해야 할지, 계화황후와 함께 영정을 모시고 춘추대제를 봉행하며 매월 삭망향례를 올리니 종묘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예 가락국의 마지막 궁궐이라 해야 할지 대궐 같은 목조건물이 즐비한 ‘덕양전’이다.

높다란 홍살문을 들어서면 태극문양을 크게 그린 솟을삼문이 웅장한데 협문 안으로 들면 또 하나의 대문인 해산루라는 삼문문루가 우뚝하게 가로막는다. 내삼문인 연신문을 들어서면 양왕과 계화왕후의 신위를 모신 덕양전이 삼 칸 겹집의 맞배지붕으로 고색창연한 단청이 옛 내음을 풍기며 단아한 풍모에 근엄함이 배어 있어 숙연함을 자아낸다. 옆으로는 군왕의 침소로 사용하기에는 옹색하지만 수정궁이라는 궁전이 자리를 잡았고 국가표준영정 62호와 63호인 두 분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은 자물쇠가 굳게 잠겼는데 동재와 서재도 안향각과 함께 모두가 보수공사가 한창이라서 문전에서 참배의 예를 갈음하고 발길을 돌렸다.

덕양전 뒷담을 돌아서 왕산 골짜기로 들어서는 초입에 자그마한 기와지붕이 길가의 숲속에서 얼핏 보여서 차를 세웠더니 ‘망경루’라는 편액이 걸린 2층 누각이 계곡을 굽어보며 없는 듯이 앉았다. 계곡으로 낙숫물이 떨어질 것 같이 바싹 다가앉았건만 무지의 소치는 아무래도 아닐 게고 딴마음 먹고 생색내며 바윗돌은 걷어가고 직강공사로 옹벽을 쌓아서 계곡의 풍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도,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이신 농은 민안부 선생의 충절과 유덕을 기리고자 세운 ‘망경루’는 옛 도읍의 송경이 그리워 더 없이 숙연하다. 널따란 누마루에 오르면 청황룡은 들보를 걸터타고 천장에서 마주하고 왕산 뻐꾸기는 사라져 간 옛 영화를 두고두고 못잊어 하는 선생의 한이라도 달래려는지 목이 쉬도록 애달프게 울어 댄다. 세상사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정권 말기면 새 줄 서느라고 레임덕이 극심한 작금의 세태가 불사이군의 충절 앞에 참으로 민망하다.

 
   
▲ 덕양전


망경루를 나와 가던 길을 따라서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이내 왕림사라는 절집이 계곡 깊숙하게 그림 같이 앉아서 한더위를 식히며 쉬어가라 일러준다. 계곡을 건너가던 옛길은 찻길로 다듬어져서 대웅전 한편으로 주차구역이 마련됐다. 자그마한 기와지붕들이 추녀 끝을 맞대고 청정하게 흐르는 물소리와 청아한 풍경소리가 어우러져 정적의 고요함에 더위를 모르고 고즈넉이 앉았다. 대웅전에 들어섰으나 딱히 빌어볼 소원이 없어 그저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마음껏 기량을 발휘해 달라며 헌향삼배의 예를 올렸다.

왕림사를 나와서 김유신 장군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 자리에 ‘신라태대각간순충장렬흥무왕김유신사대비’라는 비문이 새겨진 빗돌 앞에 섰다. 삼국통일의 대망을 꿈꾸며 시위를 당겼던 대장군 흥무대왕을 생각하며 올림픽에 출전한 우리선수들의 화살이 백발백중 금메달의 과녁에 명중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사대의 맞은편에는 단청이 화려한 단간 비각이 섰고 커다란 석비는 세월의 검버섯이 희끗희끗해 판독이 싶지 않으나 ‘가락국시조왕묘유지비명…’이라 새겨졌고 안내판은 ‘가락국시조 김수로왕의 태왕궁지’라며 서기162년에 왕자 ‘거등’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이곳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 왕후를 ‘보주황태후’로, 궁은 ‘태왕궁’으로, 산은‘태왕산’으로 명명하셨고, 태왕원년 38년간 계시다가 기묘년 3월 23일에 서거를 하셨다고 일러준다.

비각을 지나면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계곡 건너편으로 빤하게 건너다보면 드높은 홍살문과 웅장한 돌무덤이 한눈에 들어온다. 홍예석교를 건너 성역의 경계인 홍살문으로 들어서서 솟을삼문으로 들어가면 한국의 피라미드라는 가락국 10대 구형왕의 돌 능이 천오백여년의 장구한 세월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잘 보존돼 역사속의 옛이야기를 오롯이 전하고 있다.

혼자서 들기에는 버거운 크기의 시커먼 돌을 산비탈을 따라서 2등변삼각형으로 일곱 단을 쌓아 상부를 봉긋하게 했는데 웅장하고 장엄하다. 사자석상이 마주한 안쪽으로 장신의 무인석과 문인석인 쌍으로 마주하고 커다랗게 상석이 놓인 뒤로는 ‘가락국양왕능’이라는 신위비가 섰다. 찬란했던 철기문화의 오백년 사직을 신라에 넘겨주고 시조의 태왕궁지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려 하셨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국운을 탄식한들 무엇하랴만 종묘에 죄를 빌고 백성을 위로하려 이토록 애달픈 유언을 남겼을까. “과인이 죽으면 흙으로도 덮지 말고 돌로만 덮어라”했으니 비통한 마음을 초목도 함께하고 산짐승도 날짐승도 모두의 애도일까. 폐하가신지 천오백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어도 산새도 능위로는 날지 않고 칡넝쿨 한 가닥 범하지 않으며 흙먼지 한 점도 쌓이지 않고 가랑잎 하나 날려 오지 않으니 수목이 울창한 심산계곡에서 그저 경이롭고 신비로울 뿐이다.

폐하의 영혼이라도 들고 납시라고 네 번째 단 가운데에 감실이라는 작은 문을 낸 것이 산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인가. 둘러친 돌담장 너머로 증손자 김유신이 7년간 시능을 했다는 ‘흥무왕시능사우지유지’라는 작은 석비가 섰다. 천오백년의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찾아온 유생은 폐하께 읍하며 머리를 숙였다. 왕산 뻐꾸기는 목이 쉬어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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