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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93)<153>철새처럼 고향에 와 머물다 가는 시조시인 김호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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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18  21: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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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출생 김호길(1943~) 시인은 멕시코에서 대형 농장을 경영하며 해마다 귀국하여 전국의 문우들과 교류하다가 가는 것이 연례행사다. 그는 올해 제14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수상자로 귀국하여 지난 12일 만해축전에서 수상을 하고 틈을 내어 진주에 왔다. 그는 멕시코와 LA와 한국을 넘나드는 국제형 작가다.

그는 사천 정의리에서 태어나 사천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31회)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당시는 진주농과대학)에 진학하여 재학중 이명길 교수를 만나 시조 쓰기에 전념했다.

그의 창작의 출발은 이명길 교수가 붉은 볼펜으로 죽 죽 긋고 다른 말로 채워 넣은 수정 작업의 흔적이 뚜렷한 창작 노트로부터 시작됐다. 이 노트는 지도교수의 성격과 지도의 방향이 드러났고, 수강자로서의 학생 김호길의 순응과 노력의 흔적이 아름다운 추억의 페이지를 만들고 있었다.

1962년에 경남일보에 시조 <문의 의미>와 <석류>를 발표한 것이 그가 작성한 연보에 보이는데 이 발표는 대학 재학중에 ‘경일시단’에 투고한 것이었던 듯하다. 이 무렵 경남일보에는 문화부 기자로 최용호 시인이나 이월수 시인이 담당기자로 있을 때였다.

김호길은 고등학교 시절 필자와 같은 동창이었는데 1960년 고등학교 3학년때 개천예술제 백일장 현장인 비봉루에서 만났다. 그 당시의 인문계 고등학교인 진주고등학교는 문예반을 특별히 유기적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어서 교지 같은 데 글을 내는 학생들을 문예반 지도교사가 지정 차출을 하여 백일장에 참가시켰다. 김호길이나 필자나 지정차출이 아니었나 싶다.

이 시기 작가가 되기 위해 진학하는 학생들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가거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창과를 갔는데 시내 동급생들 중에 필자는 동국대로 갔고 진주여고의 김지연(소설가)은 서라벌예술대로 진학했지만 김호길은 지역에 남아 농업의 텃밭 농과대학으로 갔다. 그럼에도 뚝심으로 소리 소문없이 글을 썼다. 대학 2학년때 김호길은 개천예술제 시조부문 장원으로 존재감을 표시했다.

김호길은 1965년 경남지역의 젊은 시조시인들의 모임인 <律>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본격 시조시인으로서의 자리를 확보해 나갔다. 밀양 출신 조오현, 사량도 출신 박재두, 고성출신 서 벌, 김춘랑, 마산의 김교한, 진주의 이월수 등이 모여 음풍농월의 고시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시정과 언어를 표방하여 연구하고 합평하며 단단한 실력을 쌓아갔다. 이들은 진주로 마산으로 고성으로 내왕하면서 변두리가 변두리가 아님을 작품으로써 보여주고자 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술 실력이 두주불사 밤 새우기가 일쑤였다.

진주로 근무지를 옮긴 박재두(뒤에 삼현여중 교장) 동인의 집에서 밤샘을 하는 때는 동양화가이기도 한 박재두의 동양화 습작품 두루마리를 찾아내어 자기 것인 양 유유히 들고 나가면서 횡재라 말한 동인도 있었다. 김춘랑은 하도 술이 무분별이라 진주시내 선술집 화랑집에서 혼자 빠져나갔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수정동 공터 거지들과 형님 아우가 되어 있기도 했다. 김호길은 여기에 비해 신사였다. 술 뒤의 일화는 별반 기억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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