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상 앞이다. 켜놓았던 TV 화면이 번쩍하더니 시커멓다. 네 살 큰손자가 화분에 있던 공깃돌을 TV 화면에 조준하여 쏜 것이다. 두 번째 사고다. 첫 번째는 장난감으로 브라운관을 파손시켰었다. 브라운관 교체비와 새것으로 사는 값이 별 차이가 없어 새로 산 TV 였다. 더는 놀랄 일도 아니련만 그런데도 당황스러워 밥상에서 물러나야 할지, 태연한 척 밥숟갈을 들고 있어야할지,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손자가 아니라 내 자식이라면 붙잡아서 엉덩이라도 펑펑 때려 줄 텐데….’ 속으로만 곱씹을 뿐이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고’. TV, CF에서 나온 이 말은 이제 막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일으켰다. 아이가 귀한 세상이라서 조부모에게 손자들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손자를 훈계하는 것은 벌써 그 방법에서 세대차이를 느끼게된다.
조부모 세대들은 칭찬을 받으면 그 기쁨의 감정을 지그시 누르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다. 반대로 야단을 맞을 때는 벼락이 치듯이 정신이 번쩍하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세대들이다. 반면 신세대 부모들은 아이들의 당연히 해야 할 행동들에 지나치다싶게 칭찬을 쏟아 붓는다. 그래서 아이가 칭찬받을 일을 해서 칭찬을 받는 것인지, 야단을 맞을 때는 왜 야단을 맞는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부모는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는 것이 가슴이 아파 그 자리에서 야단친 것에 대하여 ‘엄마가 미안해’ 하며 마치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를 대한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가 무얼 잘 못했는지도 모르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두 세대의 자녀 양육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세상 모든 일에는 분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어리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들은 다 안다, 자기 손자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아이는 아이수준에 맞게 어른은 어른답게 고독한 시간의 강을 건널 수 있어야 한다. 엄마가 왜 화가 났는지, 아빠 얼굴이 왜 무섭게 변했는지. 부모는 아이가 생각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고 그 과정을 무던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화해는 그 다음에 해야 한다. 야단 친 그 자리에서 하하 호호 해버리면 칭찬도 훈계도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다. 자녀교육에 원칙이 없으면 아이는 혼란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고 아이의 행동을 바로 잡을 수가 없게 된다.
소롯이 손자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고’라는 말을 되뇌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박말임 (청주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