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5)
  • 경남일보
  • 승인 2016.08.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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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5)

양지는 피리를 들고 부엌 뒤의 허물어져 명색뿐인 담을 넘었다. 그 옛날, 밤마다 대숲을 헤치고 나가 동경 유학생 애인을 만나기 위해 고모가 타넘던 곳 어디쯤일 데였다. 지금 그 울창한 대숲은 없다. 대나무는 일생에 한 번 꽃을 피우는데 꽃이 핌과 동시에 수명이 다해서 누렇게 말라죽고 만다. 요즘은 죽세공품이 다른 화학제품에 의해 밀려나자 상대적으로 가격도 떨어져 인건비도 안 될 정도로 금이 헐해 빠졌다. 어머니가 서둘러서 대숲을 없앤 것은 비단 대가 말라 죽어서만은 아니라고 했다.

여기저기 조금씩 경작의 흔적이 있으나 얽혀있는 대뿌리를 낱낱이 파내고 밭을 일구었던 깐에 비하면 묵정밭으로 버려져 있는 빈터는 알뜰한 옥토로 전환시킬 어머니의 노동력이 한계에 달해 있다는 증거였다.

잡초를 덮고 누워있는 넓은 대밭의 황폐한 모양 위에다 마음으로 울창한 대숲을 그려 놓고 그 속으로 난 길을 걷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양지는 대여섯 살 적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곁에서 대나무 타기를 하며 노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얘야, 대 끌터기에 찔릴라”

할아버지의 음색은 부드러웠으나 여운에는 쇳소리가 끼였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무언가, 결기를 간직하고 산다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음성을 할아버지도 가졌을 것이었다.

‘저 놈이 언제 장정이 되어서 이 대나무들처럼 울울한 가문의 기상을 이룩해 줄 텐가’

할아버지 시대의 대나무밭의 의미는 거저 숲이나 울로 길러서 몇 년에 한 번씩 솎아 팔아 가용 돈을 보태는 것과는 사뭇 격조가 달랐다.

최 씨네의 상징은 수천 평에 이르는 왕대밭이었다. 한창 가산이 번창할 때는 봄마다 띠풀처럼 무수하게 왕죽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인지 대밭에는 그악스럽게 칡넝쿨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여린 죽순의 목을 조르듯이 칡넝쿨이 감고 올라간 대나무는 잘록잘록 곯아들어 금질에 들지도 못했다. 무심코 넘겼던 칡넝쿨의 번성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는 어쩐 일인지 대나무에 꽃마저 피기 시작했다. 꽃이 핀 대밭은 멸종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까스로 멸종의 위기를 넘긴 최 씨 가의 남자들인 할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칡과 대나무의 관계를 단순히 다른 생물에게 피해를 주는 가해식물 정도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 놓고 칡넝쿨 퇴치에 거의 광적인 집념을 보이며 매달렸다.

대나무를 기형으로 만들며 칭칭 감고 오르는 칡넝쿨을 잘 벼린 시퍼런 낫 끝으로 자르면서, 또는 잎이 연삽한 괭잇날로 뿌리까지 푹푹 파서 칡의 근원을 파멸시켜 가면서 할아버지는 마치 원수를 제거하듯 사뭇 집요하고 억척스럽게 그 일에 매달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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