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8)
  • 경남일보
  • 승인 2016.08.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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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8)

청량한 대숲의 기운을 아끼기 위해서 참고 있었던 말초담배를 꺼내 피웠다. 빨갛게 타 들어가는 담뱃불에다 자신의 심장을 지지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가슴은 울렁울렁 뛰고 또 뛰었다. 아프고 쓰린 가슴의 동계를 비집고 병으로 골골거리던 아내가 죽자 주리고 추하지 않게 남매를 기르느라 홀아비로 살며 노심초사했던 지난날들의 어려움이 주마등처럼 밀려오고 밀려갔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그러잖아도 혼사를 서둘려던 참이었다. 왜인들의 만행이 점점 악랄해지더니 이제는 색시나 처녀들을 뽑아 전쟁터로 보내서 왜군들의 밥과 빨래 수발을 들게 하는가하면 어떤 곳에서는 그보다 더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시킨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리고 기한이 넘어도 부모형제의 품으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징용 간 자식을 기다리다가 생목숨을 끊은 부모들도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문도 아버지의 귓전을 자극해오고 있었다. 어느 때 불각시에 이 동네에도 그런 공문이 떨어질지 몰라 과년한 딸 아들을 가진 부모들은 들일은커녕 샘물까지 길어다 주며 바깥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저녁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아버지는 평소처럼 서책을 읽지도 않고 불을 끄고 누웠다. 퉁소는 광대들이나 갖는 물건이라고 꾸지람을 들은 후부터 시무룩해 있던 아들은 이 일을 아버지가 알고 있다고 저희 누나에게 고자질이라도 할까 걱정되었으나 다람쥐 마냥 요리조리 대나무를 타고 노는 일에 지쳤는지 강아지가 어미 품을 파고 들 듯이 아버지의 날개 밑에다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다. 설마, 내 딸이…. 아버지의 지끈거리는 골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들끓었다.

이제 퉁소 소리가 들려 올 시간이 점점 임박해 왔다. 속이 탄 아버지는 목침을 돌려 고이며 몇 번이나 자반뒤집기를 했다. 잇사이로 신음을 짜내며 저녁 상머리에서 은근히 떠보았던 딸의 속내를 되짚어 보기도 했다.

“오늘은 저 건너 확실이네 집에 수본 베끼러 안가나?”

딸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확실이 그 아한테 실망했어예 아부지. 무슨 아가 맨 그리 멍청한 소리만 하고 말귀를 몬알아묵는데 길래 어울리다가는 같이 반피가 되고 말겠어예”

아버지는 그때 숟가락을 딱 놓고 싶도록 밥맛이 떨어졌지만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면서 참았다. 원앙녹수처럼 어울리던 단짝 친구를 저렇게 비난하는 데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래알 같이 서걱거리는 밥알을 씹다 물 한 모금을 들이키고는 소리 나게 입을 헹구었다.

사위는 죽은 듯이 고즈넉해지고 단잠 든 아들의 코고는 소리만 새액색 감미롭게 드높아질 즈음, 아버지는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발딱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늘 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퉁소 소리, 소리….

아버지는 화진이 방의 동정을 살폈다. 화진의 방에는 아까부터 깜깜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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