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9)
  • 경남일보
  • 승인 2016.08.1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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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219 사본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9)

‘그래, 내처 잠자거라. 나오지 마라. 나오면 안 된다. 화진아, 애비가 늘 했던 말 잊지 않았지. 나라 안에서 제일 잘난 규수는 국모가 되고 고을에서 가장 우수한 처녀는 권문세가의 종부가 된다고. 너는 시부모 구존하시고 형제 남매 번성한 집의 대종부가 되어서 너 역시 아들자식 한 죽은 낳아 시부모님 사랑을 받고 가문에 영광을 바쳐야 한다’

간절한 심정으로 올리는 아버지의 기도가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바시시 문을 열고 화진이 제 방에서 빠져 나오는 기척이 났다. 마루에서 잠시 불 꺼진 아버지 방을 살펴보는 기색이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전보다 소리 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제법 요란하게 개숫물을 쏟은 다음 우물에서 부신 요강을 자리끼와 함께 챙겨 들고는 아버지가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있는 방문 앞까지 왔다.

“아버지, 자리끼하고 요강…”

약간 크게, 그러나 대답을 원치 않는 조심스러운 여운으로 중얼거리더니 화진은 돌아섰다.

그 순간 갈등과 조바심으로 긴장되어 있던 아버지의 무릎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더러 몇 번, 잠자리에서 꿈결처럼 무심히, 자리끼… 요강… 뭐 그렇게 확인하는 화진의 음성을 들었었고 역시 졸음에 못 이겨서 건성으로 응, 응 그래 너도 얼른 자거라, 잠꼬대 같은 대답을 하며 잠결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리곤 꿈결에서 아련히 퉁소 소리를 들었었다.

아버지는 머리를 싸쥐고 절망적인 몸부림을 쳤다. 방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화진의 발소리는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격앙된 아버지는 신발을 옳게 챙겨 신는 것도 잊은 채 화진의 뒤를 밟아갔다.

‘도둑을 맞으려면 집안에 있으면서도 도둑을 맞는다더니, 어허 이것이, 그 얌전한 것이 어느 결에 아비의 눈을 속였을꼬’

분노와 놀라움으로 벌떡거리는 벅찬 가슴을 안고, 한창 만남의 정회를 풀고 있는 젊은 그들 앞으로 아버지는 뛰어나갔다.

강도를 잡은 듯이 노여움에 떨고 있는 처녀 아버지의 앞에서도 청년은 조금도 주눅 든 기색 없이 늠름했더랬다. 우렁찬 목소리와 당당한 태도로 청년은 자기소개를 했는데 나이는 스무 살, 동경 유학생인데 징용을 피해 다니는 처지. 조부모님이 계시며 위로 형님 두 분이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으며 시집 간 누님이 두 분, 아래로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가 있는데 그들은 모두 동경과 한양 두 곳에서 학업을 닦고 있음. 근면 성실한 부모님의,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가진 것은 이로운 일에 사용하며 남을 도우고 살자는 가르침을 받들어서 나름대로는 착실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뜻대로 살지 못하고 이렇게 누를 끼치고 있는 중이라며 심려 끼치게 되었음을 정중하게 용서 비는 여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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