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 틈 (이서린 시인)
사라진 기억이다
돌아선 너의 뒷모습이다
벌어진 시간만큼 캄캄한
절
벽
-이서린(시인)
미세한 균열로 시작된 틈의 이미지 앞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어도 진한 아픔이 느껴지곤 한다. 허공을 분해하며 내리뻗은 저 절벽, 저 캄캄. 마치 어느 한 생에 있어 절대 잊히지 않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담담하게 붓질해 놓은 듯하다. ‘너’라는 인칭대명사는 ‘나’와 맞물려 발아한 언어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언젠가 이별이 스치고 간 게 분명하다. 너를 잊지 못하여서 나는 지금 이토록 캄캄하다는 시인의 저 조용한 언어떼가 수직 끝에 오롯이 매달려 있음을 본다.
하지만 최근 출간한 시인의 첫 시집 ‘저녁의 내부’를 통해 ‘죽음도 삶의 통로’라고 여긴다는 말을 빌리자면, 벌어진 틈 또한 삶의 또 다른 통로이지 않겠나. 어쩌면 인간이 신을 만나게 되는 접점일 수도 있겠다./ 천융희 ·시와경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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