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탐방캠프 다녀왔어요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탐방캠프 다녀왔어요
  • 최창민
  • 승인 2016.08.3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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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교육청·본보 공동주관
경남일보와 경남도교육청이 공동주관한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탐방 캠프’가 8월 10일부터 13일까지 3박 4일간 중국 상해와 남경에서 개최됐다.

탐방캠프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선조들이 완전한 대한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했던 역사적 현장을 돌아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이 뿌리를 반추하고 궁극적으로 밝은 미래를 설계해 보는 자리이다. 특히 이번에 찾아간 중국 상해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의 망명 임시정부(이하 상해임정)가 있던 곳으로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역사를 알게 하는 의미 있는 여름캠프였다. 더욱이 어두웠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상해는 중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 학생들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스스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특정 짓는 계기가 됐다. 이에 본보는 2회에 걸쳐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상해·남경탐방캠프를 게재한다./편집자 주

 
▲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현판


<상> 상해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 의사

‘사람은 왜 사느냐/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해 이 길을 택했다’

윤봉길 의사(1908년 6월 21일~1932년 12월 19일)는 일본인에 대한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 같은 글을 남겼다.

오롯이 조국에 대한 사랑과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동시에 우리 학생들의 마음에 새길 교훈이다.

 
▲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상해·남경 캠프 탐방단이 옛 상해임시정부청사에서 항일운동에 관한 자료를 관람하고 있다.


▲남국의 상해 여름도 한반도처럼 뜨거웠다. 며칠 전까지 40도를 웃돌았다는 가이드의 말이 오히려 위안이 됐다. 인솔인솔교사와 도내 학생 60여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이 윤봉길의사 폭탄투하장소인 상해 홍구공원을 찾은 것은 캠프 막바지인 13일이었다.

공원 중앙 호수 옆에 ‘윤봉길 의거현장’이라는 작은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나라 삼성에서 세웠다는 좀 더 큰 비석도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호수 옆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면 언덕 위 공터 가장자리에 아담한 2층짜리 정자를 만난다. 편액에 윤의사의 호 梅軒(매헌)이 새겨져 있다.

82년 전, 1932년 4월 29일 오전 윤 의사는 김구와 함께 생애 마지막 아침식사를 했다. 그는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며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그의 말투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낡은 시계와 도시락·수통형 폭탄을 건네받은 윤 의사는 곧장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해 사변 승전 기념행사와 일왕의 생일 기념식이 예정돼 있었다. 도시락·수통형폭탄을 지닌 것은 전년에 있었던 이봉창의사의 저격사건으로 경비가 강화된 터라 도시락과 물통만이 지참할 수 있었기 때문.

 
▲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상해남경 캠프 탐방단이 옛 상해임시정부청사에서 항일운동에 관한 자료를 관람하고 있다.


오전 9시 30분, 기념식장. 1부 일제 침략군의 열병식에 이어 1시간 후 2부 축하식이 시작됐다. 단상 위에 일본군부와 정계 요인 7명이 자리했다. 일본국가의 마지막 소절을 부를 무렵, 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오전 11시 50분, 폭탄은 정확하게 단상에 떨어져 폭발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사망했다.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 군부 핵심인물들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져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일깨웠던 홍구공원에는 현재 그 흔적이 작은 비석으로 남아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매헌이라는 작은 정자가 당시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다. 정자 2층에선 윤의사의 의거현장을 담은 오래된 비디오테이프가 상영되고 있었다.

탐방단 일행 임민규(내덕중) 학생은 “폭탄투하현장에 와서 윤봉길의사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젊은 시절 조국을 위해 가족을 떠나 혈혈단신 국경을 넘고 이곳까지 와 침략자를 응징한 것은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쾌거이자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라고 했다.

앞서 윤 의사는 조국을 떠나 선천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45일간의 옥고를 치르며 잠시 좌절한다. 그때 평북 정주여관에서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와 가족,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 1932년 윤 의사가 일본 수뇌부를 향해 수통형 폭탄을 던졌던 홍구공원 현장과 이를 알리는 비석.


‘자식 사랑하시는 어머니에게, 외람히 딴 사상을 가지고 집 떠난 이 자식은 고향이 그리워 멀리 창창한 남쪽하늘을 바라보고 저의 가는 길을 중지했습니다. 남자의 의지로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니 얼굴이 붉어져서 쓰는 연필이 바르르 떨리어 놓았습니다’

고향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울분을 표현했다. 가족보다는 구국에 대한 신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도 삶의 길라잡이 같은 교훈을 남긴다.

‘어린 아들 종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잠시적 역행이지 하년(何年)세월로 영구적 전전이 아니다. 모순이는 눈물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 가며 불변성의 의지력으로 훈련과 교양을 시킬 어머니가 있지 아니하냐’

윤 의사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한인애국단장 김구를 만난 것은 1932년 1월이었다. 홍구공원에서 야채장사를 하던 때 이봉창의사의 동경의거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터였다. 그는 김구를 찾아가 이 의사가 행한 ‘동경의거’와 같은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적의 장교를 도륙할 것을 맹세하는 입단선서문을 쓰고 항일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전승축하기념행사와 일왕의 생일 기념식이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의거에 착수,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거사를 치른 윤 의사는 현장에서 일 경찰에 잡히고 만다. 그리고 겨울인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그는 일본 이시카와현 미고우시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십자모양의 나무형틀에 묶인 채 우로(雨露)가 된다. 이 거사는 중국이 상해임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된다.

 
▲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탐방단이 홍구공원 매헌 정자 앞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고국 동포에게 유언을 남겼다.

‘부모 형제 동포여,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에게도 강한 톤의 유언을 남긴다.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돼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지만 우리들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아픈 말이다. 그의 뜻을 잊고 그냥 살아온 날에 대한 일말의 가책이다.

탐방단 일행은 매헌 정자를 둘러보며 윤 의사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홍구공원을 되돌아 나오는 길 호숫가에 중국인들이 낚시를 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강한 햇살이 비친 호수 면에 물비늘이 반짝였다.

앞서 탐방단 일행은 상해임정 청사도 둘러보며 항일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2층 청사 정문 벽에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부지’라고 새겨져 있었다. 입장료 1인 20위안(한화 3340원)을 내고 들어가면 여러 개의 방이 좁은 복도와 계단으로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각 방에는 응접실 침실 등 용도에 맞는 집기들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배치돼 있고 당시 썼던 고풍스러운 태극기도 보인다.

초대·2대 이승만, 박은식 대통령, 이상룡·안창호·홍진·김구국무령의 사진, 노태우·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문했던 기록사진이 있고 그 옆에는 상해임정을 소개하는 기록물이 방영되고 있다.

상해임정은 3.1운동 후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위해 국민적 여망과 국제적 승인 획득이라는 목표 하에 1919년 9월 단일정부로 수립됐다. 내정 외교 군사 재정 등 각 방면의 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독립운동과 민족역량의 증대를 위해 한인 2세의 교육과 독립운동의 홍보에도 전력했다.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대내·외 여건의 악화로 활동이 일시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상해임정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결행, 항일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중국내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 13년 동안 존속했고 이 청사에선 26년부터 32년까지 있었다. 1945년까지 중국 내→항주→기흥→진강→장사 광주 유주로 옮겨가며 정부체제를 유지했다. 탐방단은 청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최창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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