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2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24)
  • 경남일보
  • 승인 2016.08.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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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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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걸음으로, 양지는 안장산 능선을 넘었다.

내일이면 흙무덤의 흔적조차도 없어질 언니의 묘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미 백골이 되었지만 영혼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같이 살았던 언니.

산기슭 아늑한 양지 녘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풀꽃들이 마르고 키 큰 풀 속에 숨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조요로운 자태로 지켜내고 있었다. 하나 둘 무심한 동작으로 꺾어들기 시작한 구절초와 억새꽃이 손아귀에 가득 찼다.

‘그래, 언니에게 바칠 꽃다발을 정식으로 만들자’

양지는 본격적으로 꽃과 억새를 모으기 시작했다. 빨간 열매가 앙증스러운 까치밥도 섞었고 망개덩굴도 곁들였다. 자랑스럽게 출세하면 언니한테 꼭 꽃다발을 해다 바칠께. 그런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항상 출세의 개념은 바뀌었고 꽃다발은 아직도 갖다 바치지 못했는데 내일이면 언니의 종적은 이 세상 어디에도 꽃다발을 받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참 오랜만에 언니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언니를 정녕 잊지 못해 그리움의 눈물을 짓던 시절에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서 묘지 부근에 얼씬도 못했고 땔감을 하거나 산나물을 캐러 다닐 때에는 애착도 기억도 희미해져 가던 중이어서 한 아이가 처녀귀신 나온다 소리만 쳐도 옷자락이 끄달리는 듯 한 무섬증에 질려서 저 먼저 나 살려라 도망치고는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이 지어내는 쓴물을 어느 정도 들이켰을 무렵에는 새삼스러운 그리움과 사무치는 외로움 때문에 정말 육친을 그리는 진한 아픔으로 한 번 찾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가 기뻐할 모습을 아직 못 갖춘 자의식으로 발길이 가로막히고는 했다.

잡풀이며 댕댕이, 가시덤불, 칡넝쿨 등이 뒤얽혀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양지는 벌써 몇 번이나 넝쿨에 발목이 걸려 엎어지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지기도 했다. 손바닥 같은 다락밭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 재를 넘는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으나 아무도 밭을 경작하지 않게 되자 밭과 함께 오솔길도 풀덤불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양지는 걸음을 멈추고 휘둘러서 우선 자기네 밭이 있던 지점을 가늠해 보았다. 들깨, 팥, 메밀, 콩 등의 농작물이 신들린 듯 한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재배되던 곳은 황량한 가을 능선의 쓸쓸한 풍경이 되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을 뿐 구획이 어디였는지조차 어림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신없이 바쁘게 괭이질을 하고 거름을 넣다가도 불현듯 언니가 묻힌 곳을 올려다보며 이 죄 많은 에미를 용서해라, 니는 내가 쥑있다, 하며 탄식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처녀 총각이 죽으면 원혼이 되어서 가족이나 친지를 괴롭힌다는 속설 때문에 언니의 얼굴에도 쳇망을 씌워서 길가에다 무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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