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탐방캠프 다녀왔어요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탐방캠프 다녀왔어요
  • 최창민
  • 승인 2016.09.01 15: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남도교육청·경남일보 공동 주관
▲ 남경대학살 기념관 야외 대형조형물.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2>남경대학살 현장과 기념공원


1932년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 투척사건이 발생한 후 5년이 지난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으로 중국 남경(南京·난징)을 강제 점령한 일본군은 30만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을 강간하거나 가옥을 방화하는 등 잔혹한 살인행위를 저지른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30만명의 중국인이 희생됐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 발발 직전인 1939년 4월에는 1644부대를 신설해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대도살, 일본에서는 난징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특히 서양인들은 나치의 600만명 유대인 학살과 비유해 아시아판 홀로코스트라고 부른다. ‘난징 대학살’이다.

 
▲ 남경대학살 기념관 야외 조형물,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우리역사 바로알기 중국 상해·남경 탐방단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현장을 찾기 전인 8월 10일 장수성 남경대학살기념관에 있었다. 기념관이란 용어가 우리 정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우리 학생들이 과거 일본이라는 나라의 비인간적인 잔혹성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이를 되새겨 앞으로는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가짐을 갖자는 것이었다. 갈등을 부추긴다거나 대립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이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자는 의미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했으나 비교적 엄숙했다. 탐방단은 가이드를 따라 각 전시장을 이동하면서 관람했다.

학생들은 벽면에 전시된 사진의 충격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긴 숨을 토해냈다.

실제 학살현장에서 수 백명의 유골을 발굴해 전시한 공간에선 탄식에 가까운 외마디 비음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 일본군 2명이 중국인을 줄지워 세워놓고 100인 참수경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보도한 일본신문.


사진 중 눈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빛바랜 일본 신문. 이는 남경대학살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보도내용임과 동시에 당시상황을 증언하는 가장 상징적인 전시물이었다.

신문엔 일본장교 2명의 세로사진과 함께 ‘100인 참수 초 기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내용은 당시 일본군인 무카이 소위와 노다 소위 2명이 중국인 수 백명을 줄지어 세워놓고 군도를 이용해 누가 더 많이 살해하는지 경쟁했는데, 106명을 참수한 무카이 소위가 105명을 참수한 노다 소위에 승리했다는 내용이다. 칼로 사람 죽이는 일을 게임처럼 즐겼다는 것이고, ‘100인 참수경쟁’ 사실을 일본 스스로 인정하게 된 꼴이다.

군인 2명은 패전 이후 중국 난징에서 열린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이들은 최후까지 결코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신문보도에 대해서도 단순한 창작기사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했다.

100인 참수 경쟁 외에도 300인 참수를 달성한 다나카구니치 육군대위의 이야기도 1940년 2월에 도쿄에서 월간 황군이라는 잡지에 소개돼 다나카 군기치 대위 또한 무카이, 노다와 함께 난징에서 재판을 받아 결국 총살됐다.

이는 일본의 잔학무도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번에 탐방단이 찾아간 남경대학살기념관은 1985년 완공됐다. 이곳엔 ‘100인 참수경쟁’을 알리는 전지사료 외에도 사망자 명단, 기록사진, 살해된 뒤 묻혀 있는 실제모습 등 일본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자료 1만여 점이 전시돼 있다.

그 다음 눈에 띄는 것은 기념관 외부 건물에 새겨져 있는 ‘300000’이라는 숫자이다. 일본군에 의해 희생당한 중국인의 숫자이다.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 ‘600만 명’과 같은 상징적인 고유명사가 됐다.

남경대학살은 단 6주만에 저질러진 만행이라는 점에서 나치학살을 능가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여성들에게도 잔인한 학살을 자행했다. 총 2만~8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 중엔 임신 중인 여성들도 있었다. 시민들을 생매장하고 불태우고, 목을 베어 무차별 학살했다. 갓난아기부터 노인들까지 수 십만명이 잔인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이 제공한 학살 당시 13세였던 생존자의 증언은 처절하다.

“난징성을 침략한 일본군들이 각 성문을 뚫고 들어왔다. 성을 지키던 사령관은 줄행랑을 친 뒤였다. 그리고 무차별적인 살해와 방화를 자행됐다. 어머니는 저의 형제와 함께 동굴로 피했는데 그만 남동생을 놓치고 말았다. 되돌아갔을 때는 집이 불탔고 동생은 비명에 가고 말았다. 여동생은 탄흔이 아직도 남아 있다.”

기념관 외부 곳곳에는 당시 지옥과도 같은 처절했던 상황을 각종 조형물로 제작해 전시해놓고 있다.

 
▲ 죽은 아이의 눈을 만지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죽은 아이의 눈을 만지는 모습, 죽어서 축 늘어진 동생을 들쳐 멘 모습, 일본 군인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 죽은 아이를 들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 등 남녀노소 임신부들의 절규하는 리얼한 모습들이 전시돼 있다.

이는 일본이 행한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인데 최근 그들은 이런 사실까지도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30만명 학살과 100인 참수경쟁 사건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도 없었다. 오히려 20세기 최대의 사기극이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는다.

 
▲ 남경대학살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 


중국은 최소 25만에서 최대 35만으로, 종전 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 확인된 숫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선 일부 양심세력만이 30만 명을 인정할 뿐 20만, 10만, 수 천, 심지어 ‘20세기 최대의 사기극일 뿐 학살은 없다’는 주장도 한다.

중국으로서는 참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상 우리나라에 저지른 일제 강제징용이나 종군위안부도 부정하는 걸 보면 극우파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미뤄 짐작할 수는 있다.

우리의 강제동원 일본군위안부 배상 문제는 1992년 1월 첫 수요 집회로 시작됐으나 지금까지 미적거리면서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패망한 일본은 이제 절대 전쟁하지 않겠다며 평화헌법까지 만들었다. 뜨거운 경험으로 인한 처절한 반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 전, 정권을 잡은 아베 신조는 돌변했다. 전쟁을 할 수 있고 주변국의 분쟁지역에도 관여하겠다며 이 헌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있다. 미국을 등에 없고 어깨와 목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 내 극우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득세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아베 정권은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압승을 계기로 친위세력을 구축하는 등 극우주의자들을 포진시켰다. 여성 아베로 불리는 이나다 도모미를 방위상에, 마쓰노 히로카즈도 문부과학상에 임명했다. 방위상은 군 위안부 강제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일본의 과거 전쟁 책임까지 희석시키는 발언을 수시로 해온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이다.

 
▲ 발굴된 유해


실제 그는 과거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의 실상은 중국정부에 의해 부풀려졌고 100명 참수경쟁도 없었다는 취지의 망언을 했다. 중국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남경대학살 기념관 한 복판에는 평화의 탑이 서 있다. 한 여인이 한쪽 팔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높이 쳐들고 있는 광경이다. 대학살 기념관 안에도 ‘可以寬恕 但不可以忘却(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인류 평화를 염원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일본이 진정한 반성 없이 이렇게 나오는 마당에는 이 탑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번 캠프에 참가한 안서영(관동중)학생은 “일본인들은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까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젊은 남성과 여성들을 끌고 가 강제노역을 시키거나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는데, 이번에 중국인 30만명을 살해한 현장을 보고나니 마음이 더 무겁고 우울해진다”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변국들이 서로 화합하고 협력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본이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부끄러움이 없는 처신을 해야 할 분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기념관 중앙에 있는 평화의 탑

▲ 300000이라는 숫자는 당시 희생된 중국인의 숫자를 의미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