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나 진주사람 리영달이 들려주는 ‘나의 고향’
에나 진주사람 리영달이 들려주는 ‘나의 고향’
  • 김지원
  • 승인 2016.09.0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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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다 사진갤러리 진주사진의 재발견 리영달 회고전
 
루시다 사진갤러리에서는 22일까지 진주사진의 재조명-사진의 계명성이라는 주제 여는 릴레이 사진전 중 첫번째 전시회로 리영달 작가의 회고전을 열고 있다. 전시회 취지를 설명하고 있는 리영달작가(왼쪽)와 이수진 루시다 사진갤러리 원장. 김지원 미디어기자


몇가지 체크리스트가 있다.

진주성 안에 초가집,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시절을 알고 있다면, 해마다 뒤벼리에 홍수가 졌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서장대 아래 바위틈에 앉아 흥분한 싸움소들이 뿔을 부닥치던 풍경을 보았다면. 남강에서 멱을 감고 썰매를 탔었다면 이 글을 보는 독자는 중년을 넘은 진주 토박이 일거다.

지금 민가를 철거한 진주성엔 반듯한 산책로가 놓여있고 고가가 놓인 뒤벼리는 6차선 도로가 났다. 서장대 아래 모래톱은 분수대가 화려하고 수심 깊어진 남강에는 오리배마저 수질오염을 염려해 몇해전 철거했다. 눈깜빡 할 사이에 변해버린 도시는 그 속에 살고 있을 때는 알수 없는 향수를 빠르게 지워나가고 있다.

사라져버린 그 순간들의 이야기가 진주시 호탄길 루시다 사진 갤러리에서 다시 시작됐다. 루시다에서는 3일부터 22일까지 진주 사진작가 1세대로서 진주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온 리영달 선생의 회고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진주 사진의 재발견-사진의 계명성에 부쳐’라는 주제로 마련된 릴레이 전시회 중 첫 전시회다. 진주지역 사진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진주사진역사를 체계화 하려는 루시다 사진 아카이브 연구회의 기획으로 마련됐다.

진주에서 상업사진이 아닌 예술사진으로서 사진문화는 1960년대 사진작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작돼 반세기를 넘었다. 진주에 문화로서 사진을 상륙시킨데는 리영달 박사의 공이 컸다. ‘나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이번 회고전을 마련한 리영달 박사를 치과의사로서 본업을 지켜나가고 있는 리치과에서 만났다.



 
리영달 작가는 두 권의 작품집을 발행했다. 진주사람들과 진주풍경을 다믄 나의 고향과 투우라는 주제로 엮은 투우 사진집이다.


오후의 진료가 마무리될 시간이었지만 리 선생을 찾는 오래된 환자들이 계속 병원을 찾아들었다. “오늘따라 환자가...”라며 웃음짓던 선생은 보물같은 책을 꺼내놓았다. 몇권 남지 않았다는 사진집 ‘나의 고향’과 ‘투우’ 두 권이었다. 1959년 서울치대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리영달 선생은 도립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른 아침이나 주말에는 사진 촬영에 몰두했다고 한다. 어렵게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고향,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향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길을 사진에서 찾았다고 했다. 고향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 작업이 ‘나의 고향’에 담겨 있다. 투우의 고장인 진주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집이 ‘투우’이다. 리영달 선생의 투우사진 작업은 1985년 세계 126개국을 대상으로 3개국어로 발행되던 한국홍보잡지 ‘SEOUL’ 12월호에 소개돼 전 세계적으로 진주투우를 알리기도 했다.

애초에 그림을 잘 그려 만화로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는 리 선생이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은 두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유네스코의 ‘인간가족’이라는 보도사진전 관람을 통해 사진이라는 매체에 감명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사님의 라이카카메라였다. 진주에서 치과를 차리고 다큐멘터리 사진활동을 하면서 리 선생은 지역이 사진문화 정착을 위해 수많은 클럽들을 만들었다. 예술사진의 선발주자로서 사진동호인들의 활동무대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1961년 진주사진클럽을 시작으로, 1968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진주지부, 1969년 일요사진클럽, 1974년 경상대 사진클럽 포커스를 만들고 여수에까지 사진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같은 시기 활동한 김종태 작가가 포트레이트 사진을 중심으로 활약했다면 리 선생은 사연을 담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인간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한편으로 개천예술제 기록을 도맡아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사진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리 선생은 에나 진주사람이라 불린다. 진주문화사랑모임을 통해 진주문화를 지키고 복원해 나가는데 맨 앞에 서 있는 선생이다. 선생은 망진산 봉수대나, 방치돼 있던 신현수 선생 송공비를 옮겨간 일 등 내 손을 거친 진주역사복원이 13건이 된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선생은 1919년 3월18일 있었던 진주 걸인 기생 만세운동의 복원에도 애쓰고 있다. 리 선생은 한번에 풀어놓기도 어려운 진주문화와 진주사람들, 진주사진 이야기들을 담은 회고록을 준비중이다.



 
본사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제9회 보도사진전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신문협회에서 보내온 수상소식과 1971년 7월20일자 지면에 실린 기사.


인터뷰가 무르익자 선생은 뜻밖에 인연을 털어놓았다. “내가 한때 경남일보 기자 한 걸 알아요?”

회고록을 준비중인 자료에서 제9회 보도사진전의 수상작 리스트를 찾아냈다. 1971년 보도사진전 장려상에 경남일보사 리영달 ‘이것도 국도냐’가 수상했다는 자료였다. 1970년대 김윤양 박사가 경남일보를 운영하던 시절 이상지 편집부장 등의 요청으로 5년여 사진기자로 활동했다는 이야기였다. 본지의 1971년 7월20일자 지면에도 리영달 기자의 수상소식이 실려 있었다.

이번 전시회는 1959년부터 시작된 리 선생의 사진인생에서 4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회는 첫 작품집의 이름 ‘나의 고향’을 가져왔다. 1960년대 고향풍경을 기록한 아날로그의 향수를 전시장 가득 채웠다.

 선생의 사진작업은 2003년에 접어들어서야 디지털로 전환됐다. 디지털카메라의 결과물이 확대해서 인화할 수 있을 정도의 화소가 보장된 시기가 그 즈음이었다. 디지털로의 전환은 초상권 보호라는 이슈를 몰고 왔다. 누구나 셀카를 찍을 수 있게 되자, 촬영의 대상이 되는 일은 원치않는 일이 되었다. 아날로그 시절 하루고 이틀이고 찾아가 친분을 나눈 후에야 카메라를 들고 촬영에 임했던 선생이지만 빠르게 바뀌는 사진문화에서는 한걸음 물러섰다. ‘인간 대 인간’의 유대감을 통해 최고의 기록의미를 찾아왔던 선생은 포커스를 살짝 옮겨갔다.



 
리영달 작가는 최근 연의 일생을 기록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루시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사진전 한켠에서 선생의 최근 활동도 엿볼 수 있다. 연의 일생을 통해 인생을 반추한다는 선생은 사시사철 연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화려한 연꽃을 상상하면 절반만 맞다. 찢어진 연잎, 시들어버린 연밥, 꺾여진 연가지 ‘희로애락’처럼 연의 모든장면을 촬영하러 새벽같이 집을 나선다는 리 선생이었다.

전시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리 선생이 또 하나 집중하는 대상이 있다. 기생꽃이라며 대접받지 못했던 홍매화. 사람대신 찾아나선 대상답게 한 송이 한 송이 찍혀 있는 홍매화 사진은 저마다 표정이 살아 있었다. 마치 리영달 선생의 3번째 사진전 ‘진주의 외곬인’에 등장한 인사들을 보는 듯한 사진들이다. 2003년 진행된 ‘진주의 외곬인’ 사진전은 20명의 에나 진주 사람들을 있는그대로 촬영한 독특한 인물사진전이었다. 본사를 운영했던 김윤양 박사나, 개천예술제를 이끈 설창수 시인, 국악계의 거인 김수악님, 교방문화의 대표인물 성계옥님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진주인의 참모습을 선사한 전시회였다.

그 후로 13년만에 다시 열린 리영달의 ‘나의 고향’ 사진전. 여든이 넘은 원로 작가가 전하는 진주의 옛모습은 50·60대에겐 향수어린 공간이지만, 20·30대는 기억에 조차 없는 모습이다. 불과 몇년전에 없었던 혁신도시가 지금은 우뚝 서 있다. 그렇게 순식간에 변하는 도시의 옛 모습이 진주를 무대로 활동한 사진작가들의 노고로 프레임 속에 담겨 있다. 다시 한번 체크리스트를 보자. 추억 속 바로 그 풍경을 지금 루시다 사진갤러리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김지원 미디어기자



 
루시다 사진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에나 진주사람 리영달 ‘나의 고향’ 회고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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