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기행 (85) 불일폭포를 찾아서
윤위식의 기행 (85) 불일폭포를 찾아서
  • 경남일보
  • 승인 2016.09.0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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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길 올라 스님의 채마밭을 지나면 폭포소리가 먼저 반긴다
▲ 불일폭포



폭염이 잠시 멈칫거리기에 북새통을 이루던 피서지보다 여유롭지 않겠나 하고 느긋하게 더위도 식힐 겸하여 심산 절집을 벗 삼은 불일폭포를 찾아서 길을 나섰다. 화개장터에서부터 거슬러 오르는 화개천의 물길도 여느 때와는 달리 가뭄의 여파로 실개천 같이 가늘어졌고 북적거리던 피서인파도 썰물처럼 빠지고 크고 작은 바윗돌만 옹기옹기 모여서 웅크리고 앉았다. 무성한 이파리로 하늘을 가려서 길게 터널을 이루고 줄지어 선 십리벚꽃길을 벗어나 쌍계사로 잇는 다리를 지나쳐 목압교를 건넜다. 천년의 향기 어린 녹차의 고장 목압마을로 들어서니 국사암 가는 좁다란 산길은 도랑을 따라 이어졌다.

아름드리 장송이 띄엄띄엄한 수림 사이에서 짙푸른 대숲이 우거져 그늘을 마련한 주차장 옆으로 불일폭포로 가는 안내판이 국사암 오르는 돌계단 앞에 섰다. 심산유곡을 들었으니 산중 절집부터 찾아 입산의 예를 먼저 갖출까 하고 수령 1200년의 사천왕수 옆으로 열려 있는 국사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산중암자치고는 깨나 큼지막한 ‘ㄷ’자의 본존건물의 중앙정면에는 커다랗게 ‘국사암’ 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안쪽 깊은 중앙이 인법당으로 우로는 칠성전과 명부전을, 좌로는 염화실과 옹호문을 나란하게 거느리고 천년고찰의 옛 내음을 그윽하게 풍긴다. 마루청을 올라 법당으로 들었더니 목조여래좌상이 지긋한 미소로 중생을 반기신다. 839년 신라문성왕 원년에 혜소 진감선사께서 암자를 세워 주석하셨던 ‘보월암’이었다는데 민애왕이 스승으로 봉하여 선사를 국사로 칭하였다 하여 ‘국사암’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사암을 나서서 불일폭포를 찾아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수많은 중생들이 천년세월을 두고 오고간 흔적일까. 속죄하며 올리고 소원 빌며 올린 돌이 켜켜이 쌓고 쌓인 돌탑을 지나면 작은 고갯마루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과 불일폭포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어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쌍계사 0.3km, 불일폭포 2.0km라는 이정표를 지나 끊어질듯 이어지는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바윗돌이 우람한 덩치로 너덜을 이루는 계곡길이다. 편편한 돌을 언제 누가 이토록 튼실하게도 촘촘히도 깔았을까. 세월에 닳고 닳아 반들거리는 계곡길을 오르면 계곡이 깊어지면 방부목다리가 놓여 있고 야트막한 계곡에는 아름드리 바윗돌의 징검다리가 넓적넓적한 등짝을 내밀고 줄지어서 앉았건만 계속되는 가뭄으로 할 일 없어 미안한지 웅크린 모양새가 가엾고도 처량하다.

희끗희끗한 돌이끼가 채색된 웅장한 바위가 길섶을 지키는 틈새를 돌 때마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인적 없는 산속의 적막감이 깊어만 가는데 외진 길 걷는 객의 적적한 심사를 눈치라도 챘었는지 꼬리를 짊어진 바위 끝의 다람쥐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길안내를 나섰다. 한눈을 잠시 팔면 흔적조차 없다가도 어느새 저만치서 쪼르르 앞서가며 쫑긋쫑긋 신이 났다.

세월의 때가 되어 돌이낀가 했는데 바윗돌에 새겨진 문양은 분명한 글씨인데 이두문자일까, 상형문자일까 손바닥으로 쓸고 닦아도 가늠이 안 가는데 저만치의 또 다른 바위는 고운 최치운 선생께서 청학을 타고 넘나들 때 청학을 부르던 ‘환학대’라 했다. 쌍계사에 있는 국보 47호인 ‘진감국사대공덕비’의 비문을 고운 선생은 이곳 환학대에서 지으셨다니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커다란 바위이다.

환학대를 지나 ‘마족대’라는 커다란 바위에 섰다. 길에서는 평평하지만 내려다보면 계곡에 뿌리를 박은 아찔한 절벽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지리산을 오르내린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 하여 ‘마족대’란다. 조릿대인 산죽이 우거진 산길은 갈수록 가팔라지더니 훤하게 고갯마루의 천공이 먼동이 트듯이 밝아 왔다. 불일평전에 닿은 것이다. 등산객들이 왁자지껄했던 산장이었을까. 인적은 끊어지고 거미줄만 뒤엉킨 초라한 폐가는 을씨년스럽다. 옛적의 이맘때면 감자 삶고 옥수수 삶는 냄새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이웃끼리 정겨웠으련만 잡초 우거진 폐허는 옛 영화를 잃은 채 말없이 허무하다.


 

▲ 불일암


고갯마루에 닿아 비스듬한 비탈로 내려서자 통행제한의 그물망에 낙석 제거공사 중이니 우회하라는 현수막이 막아섰다. 우회하는 비탈길은 위험천만이다. 로프를 잡고 이어지는 좁은 길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산길 우회라니 막막하지만 곡예를 하다시피 작은 골짜기를 건너서자 야트막한 돌 축대가 골짜기와 잇대어 길게 층을 이루고 있어 오래전의 천수답임이 짐작되는데 고산준령을 이고지고 넘어야 했던 옛사람들을 생각하니 힘들어했던 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암 말 않고 급경사의 비탈을 줄을 잡고 내려서자 길옆으로 들깨와 가지와 고추가 심겨진 작은 텃밭의 울타리에 ‘스님의 채마밭’이라는 알림판이 있어 ‘불일암’이 코앞이다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폭포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한결 가벼워진 발길을 옮기자 숲속에 가려진 기와지붕의 용마루가 더 없이 반가웠다. 임시등산로는 불일암 뒤로 들게 돼 있었다. 오두막 같은 산중 절집이겠지 했더니 앞으로는 반듯한 요사채를 거느리고 축대 위의 대웅전은 맞배지붕의 삼 칸 겹집으로 단청도 화려하고 풍모도 당당하다. 법당으로 들어 헌향의 예를 갖추고 축대 아래의 샘물을 한 쪽박 들이켜니 심신이 날 것 같다. 이제야 사방의 풍광이 눈에 잡힌다. ‘비폭정상불일암’(飛瀑頂上佛日庵)이라는 주련이 걸린 요사채의 댓돌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한 켤레의 하얀 고무신이 어쩐지 처량한데 추녀 끝의 등롱은 오수로 잠들었고 산 높은 봉우리엔 흰 구름이 한가롭다.

중생의 인적에 요사채의 문이 열리고 준수한 용모의 젊은 스님이 합장으로 반기신다. 무지한 중생과의 선문답이 오간 끝에 법명이 ‘일룡’이란다. 축대에 기대선 지게가 손때 묻어 반들거려 스님을 또 한 번 보게 한다.

삼신고봉 백운휴(三神高峯 白雲休)

비폭불일 독고승(飛瀑佛日 獨孤僧)

허리띠 졸라맸던 부모은덕 어쩌자고 속세와 절연하고 가사장삼 걸쳤을까, 천륜 끊고 인륜 끊고 심산절집 외진 곳에 주야장천 독경염송 용맹정진 끝이 없고 죄업 빌며 절하면서 목탁 치며 밤새워도 성불득도 요원하고 세월만 속절없어 불혹을 넘었구나.

아하! 어쩌다 주제넘게 성역을 범하는 우를 저질렀으니 합장으로 예를 가름하고 요사채 앞으로 난 절집문의 돌계단을 내려서서 담장을 따라 급경사로 이어진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웅장한 암벽을 타고 세차게 쏟아지는 불일폭포와 마주섰다. 가뭄으로 물줄기가 가늘기는 했어도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의 위용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훗날 가뭄이 가시면 다시 와서 보리라 불일폭포의 웅장하고 장엄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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