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3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32)
  • 경남일보
  • 승인 2016.09.1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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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32)

언제부턴가 돈이 윤활유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유교적인 양지네 집에서는 좀체 인정되지 않던 생소한 비유이기도 했다. 돈보다 사람의 정신이 먼저라고 우기는 아버지의 주장을 무시하며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새마을 운동은 울타리 밖이라는 넓은 터전을 공공연한 활동무대로 언니에게 선사했다. 가난한 농군의 아내나 쉴 참을 갖고 와서 잠시 거드는 정도였던 들일에 여자들이 동원되었다. 마을길을 넓히는 새마을 공사는 물론 벌거숭이산을 녹화시키는 사방공사에도 얼굴만 내밀었다하면 밀가루 따위의 식량과 품삯이 나왔기 때문에 너도나도 일복으로 평상복을 삼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집에서 어정어정 노는 사람이 부끄러웠지 일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새로운 풍토가 조성되었다. 여자들이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서 땀 배인 얼굴을 닦고 물을 만나면 허연 다리를 내놓고 씻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내외를 하고 지내던 잘 모르던 남녀도 한 나절만 같이 일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어 시골 풍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던 꼬꼬장한 노인네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도 노동의 대가에 맛을 들였다. 삯으로 받아서 쌓아놓은 밀가루나 보리쌀은 돈과 바꾸어졌다.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되었고 돈을 버는 일은 남자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 같은 돈을 벌어도 위험한 일, 어려운 일, 더러운 일 안하고 시원한 그늘, 눈비 걱정 없이 넥타이 매고 책상 앞에 앉아서 ‘펜대만 놀리면서’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벌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너도나도 확연한 안목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의 사령관인 아버지들은 머리 쓰서 투자효과를 겨냥했다. 남의 집에 가버리면 그만인 딸자식보다 아들에게 우선순위를 매겼다. 남존여비의 오랜 관습에 순치 되어 있던 딸들도 당연히 가문의 번성을 위해서, 남자형제의 영화로운 날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몸 바쳐야 될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실행하고 나섰다.

지식 없는 여자들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직장이란 뻔했다. 그러나 집을 떠난 그들이 남모르는 무슨 일을 하였든 간에 표정도 발랄해지고 훤하게 세련된 신수로 귀향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언니를 얼른 시집보내고 싶어 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사위도 반자식은 된다고 남들이 칭찬하는 깐으로 좋은 사윗감을 만날 것 같은 기대가 없지 않았음에 잘 키운 남의 아들을 사위 삼아 허전한 옆구리를 데워 볼 생각을 내심 품음직도 했다. 거기까지는 지극히 종래 적이고 평범한 어버이와 자식 간의 관심이고 사랑의 절차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뿌려졌던 불행의 씨앗은 어느새 표피를 찢고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당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딸자식이라 여기고 있던 언니에 대한 아버지의 복안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돈을 번다고 바깥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언니의 언행은 전처럼 다소곳하지 않았다. 변해가는 언니의 활동에 대한 아버지의 소심증이 불쏘시개처럼 타오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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