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하동, 의신계곡 서산대사길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하동, 의신계곡 서산대사길
  • 경남일보
  • 승인 2016.09.0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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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선생의 지팡이, 그 나무가 맞소?
▲ 범왕리 계곡에 있는 세이암.


◇신선이 된 고운 최치원 선생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눈 덮인 들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부수호란행):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서산대사가 남긴 시다. 교육자, 공무원, 정치인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새겨야 할 잠언이다. 30여년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필자의 흔들리는 발걸음을 바로잡아준 좌우명과도 같은 시다. 서산대사길, 신흥사가 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던 의신마을을 연결한 4.2㎞의 길로, 서산대사가 의신계곡에 머물면서 자주 오가던 길이다.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흠모해왔던 분이 즐겨 다니셨던 길이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이곳을 꼭 한번 탐방해 보고 싶었다.

 

▲ 최치원 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되살아났다는 푸조나무.


진주에서 하동 신흥마을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렸다. 내리자마자 세이암과 푸조나무부터 찾았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 범왕리 앞 계곡에 있는 세이암에 앉아 세상살이에서 더러워진 귀를 씻은 뒤, 지팡이를 꽂아놓고 산으로 들어가면서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자신도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학을 타고 속세를 떠났다는 전설을 직접 눈으로 만나보기 위해서다. 전설에 의하면 세이암 글자는 고운 선생이 손가락으로 새겼다고 한다. 건너편 절벽에는 후대 사람들이 새겨 놓은 세이암 글씨가 남아있다. 이곳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는데 게가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 선생이 이를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이곳에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는데 그후 범왕리 계곡에는 게가 서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한번쯤은 골치 아픈 세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 곧 잠수와 힐링을 꿈꾸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운 선생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귀를 씻은 선생은 개운한 마음으로 짚고 있던 지팡이를 지금의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입구에다 꽂아 놓고 지리산으로 포행을 떠났고 마침내 신선이 됐다고 한다. 그때 꽂은 지팡이가 움이 돋아 되살아났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푸조나무다. 나이는 500살 정도라고 하는데, 신라말에 살았던 최치원 선생과 연대를 맞춰보면 그 나이가 맞지 않은 부분도 있다. 넓게 드리운 그늘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길 표지문.



◇민중의 염원이 담긴 서산대사길

신흥교를 건너기 직전에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길’로 접어드는 입구가 나온다. 홍살문처럼 아름답게 세워놓은 표지문이 서 있다. 마치 의신동천으로 들어서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은 처음부터 호젓했다. 발 아래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 귀에 가득찼다. 아마 서산대사와 고운 선생은 이 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모든 번민을 모두 흘러가는 계곡물에다 버리고 저 청정한 물소리만 바랑 가득 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도술을 잘 부렸던 서산대사는 저 물소리를 목탁소리로 바꿔놓고 포행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걸음 하나하나가 경건해진다.

얼마쯤 걸어가다 길가에 있는 무덤 하나를 보았다. 무덤 주위엔 녹차나무로 산담(울타리)을 만들어 놓았다. 역시 이곳이 야생차로 유명한 하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들의 침입도 막고 찻잎도 따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한참 땀을 흘리며 고갯길에 올라서자 의자 모양의 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쳐들어와 의신사를 불태우고 범종을 훔쳐가려 하자 이를 본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범종을 돌의자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산대사가 어찌 그런 도술을 부렸을까마는 이런 전설 속에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다. 왜군들이 쳐들어오자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제 한몸 살기 위해 모두 도망을 치는 꼴을 보면서,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켜준 서산대사한테 민중들은 전폭적인 신뢰와 더불어 신적의 권능을 가지길 기원했을 것이다. 나라와 백성들의 구원자가 되어주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서산대사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벼슬아치나 무능한 임금에 비해 서산대사야말로 그들에겐 구원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서산대사를 떠올리며 한참이나 의자바위에 앉아 쉬었다.

 

▲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서 만든 의자바위.

서산대사길 중간쯤에 외딴집 한 채가 있었다. ‘화장실’이란 아주 작은 팻말이 있어 호기심으로 들어가 보았다. 집 바깥에 지어놓은 재래식 화장실인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래가 아득했다. ‘아, 이곳이 바로 똥돼지를 키우던 곳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볼일을 보면서도 갑자기 활짝 미소 띤 흑돼지가 나타날 것 같은 묘한 설렘을 갖기도 했다. 바위틈으로 난 길옆에는 토종벌을 키우는 벌통이 여러 개가 있었다. 오두막집과 벌통이 참으로 정겹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몸은 땀범벅인데도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역사의 아픔이 밴 계곡

4.2km의 서산대사길 끄트머리에도 처음과 똑같은 표지문이 서 있었다. 지칠 법도 한 발걸음이 계곡 위로 나 있는 구름다리를 흥겹게 흔들어댔다. 의신마을에 도착하자 곧 바로 지리산역사관을 찾았다. 6·25전쟁 당시 빨치산이 가장 많이 활동했던 곳이 벽소령이었다. 그 벽소령 입구에 세워 놓은 ‘지리산역사관’은 빨치산의 역사와 토벌 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총기류 등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지리산을 주 무대로 살아가던 화전민들의 생활상과 설피, 나무절구, 나무김칫독 등 쉽게 접하기 힘든 당시 생활 도구들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민족의 정기와 애환을 동시에 거느린 명산, 지리산. 많은 사람들이 신선처럼 살기를 소망한 아름다운 곳에 역사의 그늘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운 선생의 신선사상, 서산대사의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아름다운 지리산의 빛과 그늘을 공감하면서 걸었던 서산대사길, 먼발치에서 제 목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물이 어떻게 사는 것이 정녕 맑고 행복한 길인가를 대답해 주는 듯했다.

/박종현(시인·경남과학기술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차나무로 산담을 친 무덤.
작은 바위를 융단처럼 깔아놓은 서산대사길.
지리산 역사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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