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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선운산, 꽃무릇길
박종현 (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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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1  23: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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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입구, 꽃무릇이 만개했을 때의 모습

◇동백꽃 진 자리에 핀 꽃무릇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21’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 선운사 입구 빗돌에 새겨져 있었다. 잠깐 진리의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의 오랏줄에 묶여 작은 일에도 마음 아파하고 번민한다. 그 번민은 사소한 일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를 향해 전진하는 용맹스러운 사자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람, 지순(至純)한 연꽃처럼 하나의 자연세계가 되어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할 때, 그 잠깐 동안이라도 자연처럼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힐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생각을 짧은 순간이라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자연과 함께 하고, 진리와 함께 하는 보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몇 차례 선운사에 왔지만 가을에 찾은 것은 처음이다. 봄날 동백꽃이 자지러지게 핀 것을 볼 때 느꼈던 그 감동으로 선운사 꽃무릇을 보고 싶었는데 아직 철 이른 가을이라 그런지 눈치 빠른 놈들만 몇몇 꽃을 피워놓고 대부분 봉오리만 봉곳봉곳 맺혀 있었다. 꽃무릇은 9~10월에 꽃이 피고, 이 꽃이 시들면 알뿌리에서 새잎이 돋아난다. 그래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는 꽃이라고 해서 상사화(相思花)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꽃무릇이 정확한 이름이다. 꽃무릇은 여름철에 피는 상사화와는 다른 품종이다. 뿌리에는 코끼리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한 독이 있는데, 단청이나 탱화 보존에 유용하게 쓰기 위해 절 주변에 꽃무릇을 많이 심었다고 한다. 선운사 뒤뜰엔 동백꽃이 진 자리, 고목에 열린 밤알 크기의 동백열매가 꽃만큼이나 소담스러웠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아직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서정주 시인의 시 ‘선운사 동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 부패한 벼슬아치를 훈계하는 듯한 도솔암 마애불.


◇도솔암 가는 길

선운사를 지나 계곡을 낀 길을 따라 도솔암으로 향했다. 진리의 말씀과 선운사 동구 시구(詩句)를 되뇌며 걸어서 그런지 연한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산이 무척 서정적이었다. 그런데 골짜기 흐르는 물을 보니 마치 탄광촌 계곡에서 흐르는 물처럼 검은 색이었다. 궁금해 하던 차에 길섶에 선 안내문에, ‘도토리와 상수리, 떡갈나무의 열매와 낙엽에 포함된 타닌 성분이 계곡 바닥에 침착되어 물이 검게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탐방로 옆에는 도토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숲속으로 난 길을 쉬엄쉬엄 한 시간 정도 걸어서 올라가자, 아주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반겼다. ‘장사송’이다. 이 소나무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가지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나무의 나이와 맵시 등이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장사송 옆으로 난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진흥굴을 만날 수 있다. 진흥굴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태자 때부터 불교에 뜻을 두었다가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선운사로 와서 승려가 되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흥굴에서 조금만 더 올라오면 진흥왕이 왕비의 별호인 도솔이란 이름 따서 지은 도솔암이 있다. 도솔암, 미륵보살이 머무르는 천상의 정토인 도솔천에 세운 절, 도솔 도솔 마치 풀벌레 울음소리처럼 정겹고 청아한 이름이다.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인 도솔천이란 이름에서 연유한 도솔암, 사방에 비치는 아름다운 풍광이 그 이름을 뒷받침 해 주는 듯했다.

 
   
▲ 다이어트를 한 듯 잘 빠진 장사송.


◇이상세계를 구현하려한 도솔천

도솔암 내원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정말이지 인간세상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도솔암 서편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지역 사람들에겐 ‘미륵불’이라고 불린다. 천상 세계에 세워놓은 도솔암 곁에 있는 미륵불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구현해 주리라는 구원신앙은 어느 시대든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 곁에 따라 다녔다. 권력자들의 핍박이 심할수록 민중들의 소망도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미륵불의 가슴부분에 표시된 사각형의 복장(腹藏)에 민중들의 염원을 들어줄 비기(秘記)가 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787년 전라도 감찰사로 부임한 이서구(李書九)가 비기를 열어보려고 했으나 갑자기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내려치는 바람에 다시 그 비기를 복장에 넣고 봉했다고 한다. 이는 비기의 주인이 벼슬아치가 아님을 하늘이 알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뒤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무르익던 무렵, 동학 정읍대접주인 손화중이 미륵의 비기를 손에 넣고 전봉준과 함께 그들의 오랜 꿈인 혁명을 이루려고 했지만 꿈은 무산되고 만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기를 꺼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모순 투성이 현실을 바로잡고 그들이 꿈꿔온 이상세계를 이루고자 한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을 미륵불의 힘을 빌어 이루고자 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꿈을 꾸는 동안만은 현세의 고통을 견디는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기란 이름으로 도솔천에 가까운 암벽에다 감춰놓았다는 동화 같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이런 이상세계에 대한 꿈을 꾸며 낙조대에 올라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도솔천이라 여기며 행복에 젖었을 것이다. 맞다. 이상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마음속에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낙조대의 석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꽃무릇 화사한 산기슭도 석양이 화엄세상을 만든 산마루도 모두 도솔천이다. 이것이 힐링이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선운사 뒤뜰의 동백나무 군락지
선운사 뒤뜰의 동백나무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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