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 지역 시인들의 이념적 개방성과 포용성
전점석 (창원YMCA 명예총장)
[경일포럼] 지역 시인들의 이념적 개방성과 포용성
전점석 (창원YMCA 명예총장)
  • 전점석
  • 승인 2016.10.1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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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김춘수가 자주 드나들었던 진해 흑백다방의 빛바랜 책꽂이에는 그의 시집과 함께 마산지역 시인인 김수돈의 ‘憂愁의 皇帝’, 정진업의 ‘정진업작품집(1971)’, ‘不死의 辯(1976)’, 이선관의 ‘人間宣言(1973)’, ‘毒水帶(1977)’ 등의 시집이 나란히 꽂혀 있다. 며칠 전 진해 웅동에 있는 김달진문학관에 들렀다가 1949년 진해중학교에서 국어작문과 옛글(고전국문학)을 가르쳤다는 설명문을 읽었다. 그 당시 진해중에는 시인이 두 분 있었는데 월하 김달진과 화인 김수돈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갑자기 교무실에서 나눴을 두 분의 일상적인 대화내용이 궁금해졌다.

해방 직후 이념적 혼란기에 같은 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10년 선후배인 두 시인은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화인은 3년 전인 1946년경 경남여중에 근무할 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를 받아 도피생활을 했다. 월하도 화인의 사상이 불온하다고 보았을까, 아니면 감시하고 고문한 경찰이 나쁘다고 생각했을까. 이성모의 표현처럼 “정의를 앞세워 굳세고 튼튼한 정신을 내세우지 않는 분”이었으니까 당연히 정의와 불의를 따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일제시대 말기에 시국에 대한 불온한 발언을 계속해서 요시찰 인물로 찍혀서 감시당했던 월하의 경력으로 볼 때 화인이 당했던 아픔을 위로했을 수도 있겠다.

대여 김춘수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소련군에 의해 2500여명이 무참히 죽었을 때, 아픈 마음으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를 썼으며, 부정선거에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희생된 마산 3·15민주화운동의 희생자인 소년들에게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라는 시를 바치기도 했다.

월초 정진업은 1948년 부산일보 문화부장으로 근무하다가 1949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는데 1950년 8월에 용공기자로 몰려서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같은 해에 교사였던 그의 여동생 미혜가 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었다. 그는 이 아픔으로 여동생에 대한 연작시를 썼다.

나는 갑자기 궁금했다. 마산에서 함께 문협활동을 하던 두 사람은 평소에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대여는 1961년에 문총, 월초는 1967년에 문협회장을 각각 했다. 대여는 월초의 사상이 불온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를 어떻게 위로했을까. 상호 인식과정을 거치는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추구하며 시에서 이데올로기를 배제해온 순수시의 대부인 김춘수는 광복 직후 화인과도 청년문학가협회 활동을 같이하면서 시동인지 ‘낭만파’를 펴내기도 했다.

김춘수와 함께 창동백작 이선관도 소중한 지역 시인이다. 개발독재시절에 용감하게 폭로한 시 ‘독수대’는 공해문제를 정면에서 다뤘으며, ‘헌법 제1조’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 미친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시이다. 물론 생전에 시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긴 했지만 같은 지역, 동시대에 시작활동을 하면서 모두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지역에는 이념적 개방성과 포용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문화예술을 좋아하는 일반시민의 입장에서는 작고한 유명한 시인이면 모두 좋아한다. 작품이 서로 다른 것일 뿐이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닐 정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작품과 적극적으로 담은 작품, 모두가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전점석 (창원YMCA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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