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7주년에 들어본 세대공감 토크
창간 107주년에 들어본 세대공감 토크
  • 김귀현
  • 승인 2016.10.10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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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는 창간 107주년을 맞아 3세대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경남일보가 진주에 뿌리내린 긴 역사에 시민, 독자 한 분 한 분이 시간을 보태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본보와 함께 세월을 보낸 70대 어르신, 지역의 축이 될 30대 청년, 본보 나이보다 100살 적은 7살 어린이를 모셨습니다. 세 분께 진주와 경남일보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대답을 모아 전합니다. 이 글은 세 분과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내용임을 알립니다.


 
김수업 (사)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경남일보, 그간 잘 왔소”
김수업(78) (사)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


1939년 2월, 금곡면 두문리에서 났소. 양 쪽에서 넘어오는 냇물이 이 동네서 합쳐진다 해서 ‘두물’로도 불리던 곳이었소. 백발 훈장님께서 천자문을 가르치시던 서당이 남아있었지.

도심으로 나온 건 동생이 태어나고 나는 너다섯살 쯤 됐을 무렵이오. 가난했어.

왜놈이 설치는 진주 땅이 상상이 되오? 그 때는 전쟁한답시고 청년이고 장년이고, 남자만 보인다 하면 끌고가던 시절이었어. 도시에서 지금처럼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없었지.

교통 법규를 어겼다느니…별 핑계를 대고는 경찰서로 끌려가면 징병·징용되는 거요. 부모님께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셨다지. 이게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진주 도심인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덜컥 동생이 병사했어. 한약방에서 좋다는 약을 지어먹였지만 먼저 가고 말았지. 개구리가 앓이를 낫게 해준다는 말에 온 들판을 쏘다니며 개구리를 잡던 기억이 나.

고학년이 되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당신 몫을 어머니와 나눠 지고 살았어.

그러다 당시 6년제던 농림학교(지금의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진학했어. 졸업 때는 중·고교가 분리돼 최종 학력은 남중학교로 남았다오. 한동안 공부를 하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했는데,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셨지.

귀동냥으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대학이 있다고 하더이다. 청구대학(1948년 설립됐던 사립대학 겸 근로자 교육기관. 1967년 대구대학과 통합해 영남대학교로 개편) 원서를 쓰려면 버스를 타러 진주 도심으로 나서야 했어.

그때 진주는 어땠냐고? 일본이 설치던 시절엔 여학생들만 다니던 양잠학교가 있었고. 칠암동은 과수원도 있는 들이었어. 번화한 경상대학교 앞이며 평거동 아파트 단지, 혁신도시? 꿈에도 모를 일이었지.

도동도 시골이라 산자락 골짜기에나 집이 있지 온통 논밭이었소. 지금 복개도로는 강물이 줄줄 흐르던 곳이라 비가 오면 넘치기도 했어. 정말이야.

원서 쓰려고 대구에 함께 갔었던 친구가 있었어. 친구네 친지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 댁 어른께서 조언하셨지. 어머니를 돕겠다는 심성은 기특하지만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는 힘들다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 지원해보라고 하더군. 국어과에 합격해서 71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소.

경상대학교 사범학과를 가면 되었지 않느냐고? 허허. 그 당시 경상대에는 조그마한 몇 채 건물과 함께 농과대학만 있었는데도?

은사님이 연락을 주셨어. 경상대 사범학과가 생긴다고, 국어과도 곧 생길 거라고. 교수로 일하게 되면서 73년부터는 진주서 어머니를 모셨어. 고향으로 오길 아주 잘한 일이라고 하셨지.

이후 내가 처음 본 진주와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더군. 69년이던가? 남강댐이 생기면서 말이야.

그 전엔 비만 오면 홍수가 났는데, 큰들(지금의 대평리 또는 상평동 일대. ‘한들’로도 불림)도 도심도 물바다가 되곤 했어. 내가 나기도 전 옛날 옛적에는 물을 막겠다고 숲도 만들었다지.

우리나라에 굽이치는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곳은 진주 뿐이요. 어, 저기서 한강, 대동강 외치는 젊은 분이 있네. 거긴 엄밀히 한 줄기로 뻗은 강이야. 강 밑으로는 사람이 안 살았던 곳이지.

강이 흐르다보니 땅도 비옥했어. 문화가 흥할 수 밖에 없는 지역이지. 문화란 본디 넉넉해야 자라거든.

꽤 오래 멀리서 타지 생활을 했는데 고향은 못 잊었어. 애틋했지.

진주서 산 시절은 꼬박 45년 쯤 돼. 그러니 내게 진주가 어떤 의미겠소? 출신이 고향이라면 돌멩이 하나도 귀한 거지.

고향에서 태어난 경남일보?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지. 경남일보에 게재된 광고만 모아도 우리 현대사 연구에는 그만일 것으로 확신하오.

피와 벼를 구분 짓듯 문화에도 진짜와 거짓을 가릴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해. 진주사람은 부지런히 공부해주시기를 부탁하고 싶어. 우리 지역사를 다음(세대) 사람들이 잘 남겨줬으면 해.

그러려면 지역 언론이 힘써야 겠지. 그른 일에는 정신이 번쩍 들도록 매서운 글을 쓰고, 지역 역사나 문화를 캐낼 때면 파고들어야해. 107년이나 된 우리 신문, 할 일이 있다면 이런 거요. 경남일보, 그간 잘 왔소.


 
김기종 H&F 스튜디오 사진작가.

◇“내 고향, 이대로만 있어줘”
김기종(37) H&F 스튜디오 사진작가


진주에서 이것저것 재미난 일을 하고 있어요. 꼭 장난같지만 진지한 의미거든요.

알아봐주시는 분들께선 휴먼스 오브 진주(Humance of Jinju)를 먼저 떠올리세요. 진주를 배경으로 진주사람을 찍고 있어요.

진주가 제 아이덴티티가 된 셈이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진주에서 일 벌이고 콘텐츠도 만들고요.

80년 4월 진주 모 산부인과서 태어났어요.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 잠깐 서울에서 10개월 머물렀던 시절 외에는 전부 진주에서 보냈죠. 군대도 금산 공군부대로 가서, 진주 붙박이죠.

학창시절 내내 내성적인 아이였어요. 이현동에 살았는데, 국민학교 땐 진주여중부터 ‘덕산아파트’까지 걸어다녔어요. 그 동네 ‘무지개아파트’랑 모래·벽돌 공장이 있었어요, 공장은 지금 없지만. 당시에 이현동 사시는 분들은 다 기억할 걸요. 공장 말고도 진주 시내에 있었던 게 없어지고 새 건물이 올라가고. 타임랩스처럼 예전 기억이 스치네요.

진주에서 만나는 또래 친구들이 왜 진주에 있냬요. 그러면 좋은 말로 ‘진주는 참 좋은 곳이니까, 진주만한 도시가 없으니까’ 하고 말아요.

진주는 진짜 좋은 곳이거든요.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없다는데 저는 제가 아는 즐길거리도 전부는 못 가보고 살아요. 서울처럼 어디 큰 곳 안 가도 될 것을.

고향인 진주나 지역신문인 경남일보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어요. 나이 들었다고 표현하기 민망하지만… 나이 드니까 바뀌더라고요.

원래 생각이요? 우리 세대부터 정보를 접할 매체가 확 늘어나면서 종이신문은 뒷전이 됐죠. 제 또래에게 신문이란 교과서 같은 존재였어요. 펼치면 공부해야 할 것 같고, 사설 오리고 논술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진양호, 진주성에 대한 생각도 비슷해요. 평생 똑같은 데 있는 성, 호수.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일하다가도 5분, 10분만 움직이면 성곽이 있고 큰 물이 있는 데가 흔한가요? 진양호는 어릴 때도 지금도 특별한 공간이에요. 지금 20대나 30대는 알 걸요. 동물원, ‘진주랜드’의 위엄. 하늘자전거 타 보신적 있으세요? 지금이야 웃지만 그 땐 부모님 손 잡고 일 년에 한 두번 갈까말까 했던 곳이었어요. 저희 부모님 신혼여행지이기도 해요.

진주는 뿌리가 있는 고장, 경남일보는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이잖아요. ‘에이, 큰 도시도 많고, 지역신문이 뭐라고’ 한 게 바보같더라고요.

대단한 거죠. 100년이 넘었는데도 찾는 사람이 있고, 찾기만 하면 읽을 수 있게 발행되고 있어요. 존재 자체가 대단해요. 자부심 들어요. 지금 30대한테도 경남일보는 같이 ‘한 세대’를 보낸 신문인데요.

고향에 바라는 점이 있어요. 진주는 그대로였으면 해요. 정확히 말하면 오래된 장소가 한 두곳 쯤은 있었으면 좋겠어요. 1000년이 넘는 역사 전부는 못 담아도요.

요즘 서른을 넘기고 나니 진짜 진주 사람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른을 더해 예순이 넘고, 또 운이 좋아 아흔이 넘어도 진주는 여전했으면 좋겠어요. 경남일보도요. 찾으면 곁에 있는 신문으로 오랜 세월, 이대로만 함께해주길 바라요.



류다현 양.


◇“100살 넘으면 할머니인데!”
류다현(7) 양


안녕…하세요. 저는 일곱살 다현이라고 합니다. (이모는 신문을 만드는 회사에 다녀요. ‘신문’ 알아요?) 알아요.

(신문 본 적 있어요?) 엄마 아빠가 봐요. 읽어본 적은 없는데….

(다현이 집은 어디에 있어요?) 평거동 아파트에 살아요, 엄마 아빠랑.

(그럼 태어나서 쭉 진주에서 살았어요?) 진주에서 태어났어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필리핀에 있었는데 태어나고 나서는 진주였어요.

(다현이는 오늘 뭐 해요? 내일은 뭐 해요?) 맨날맨날 유치원 가요. 아침에, 아홉시에.

(다현이 무척 바쁘네요.) 가서 다섯시 되면 와요. 그리고 학원와서 친구랑 공부하는데.

(집이랑 진주하면 떠오르는 게 있나요?) ‘진주’. 음… 식물. 식물이 많아요. 진주는 밖에 나무도 많고 꽃도 많고 예뻐요. 우리 집에도 꽃 진짜 많은데! 나 세 살 때 그린 그림도 있고.

(진~짜 좋겠다. 근데 다현아, 오늘 이모가 왜 다현이 만나러 왔을까요?)… ….

(신문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됐거든요. 사실은 107년. 7살 다현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왔어요.) 와.

(신문 나이가 107살이에요. 어떤 느낌이 들어요?) 100살이 넘었잖아요. 근데 원래 100살 넘으면 할머니인데.

(그렇구나. 그럼 나이 많~은 할머니 같아요?) 헤헤.

(경남일보는 다현이가 보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구나?)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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