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친구야, 이 사진 생각나나?"
진주라는 옛 이야기.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본다. 돌도끼로 멧돼지 잡던 시절, 청동기로 비파검 만들던 시절, 그때도 진주벌엔 사람이 살았더랬다. 남강이 휘돌아 흐르고, 비봉산이 품은 들판에는 삼한, 가야, 백제, 신라가 일어서고 스러졌다.
백제 땅 거열성이던 이 땅은 신라 때는 임금따라 청주(靑州), 강주(康州)로 두번씩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때 처음 진주라는 이름을 얻었다. 진주향교가 그 시절 생겨났으니 107살 경남일보처럼 백살 넘은 역사 흔적이 진주에서는 흔하다.
조선 태조가 잠시 진양으로 불렀던 진주는 이방원이 왕이 되고 다시 진주라는 이름으로 되돌려졌다. 1592년 임진왜란의 진주성대첩은 논개와 더불어 빠질 수 없는 진주의 대표이야기다. 진주성대첩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남강유등축제가 월드스타로 자리잡은지도 오래다.
남강댐이 세워지기까지 뒤벼리는 해마다 물난리를 겪었고 비봉산 아래는 진주고 운동장이 넓었다. 중앙로타리로 나섰던 개천예술제 가장행렬엔 구경꾼도 넘쳐났다. 진주성 안까지 초가집, 기와집 빼곡했던 시절이 60년, 70년대 그다지 멀지도 않다. 높다란 서장대 아래 논밭을 따라 멀리 진주사범학교가 유일한 건물로 서 있던 신안동 풍경은 여느 시골 풍경이었다. 강물이 범람하는 도동벌은 모래사장이 넓어 큰들이라 불렸다.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남강, 하얀 모래톱이 아름다웠던 강변에는 낚시꾼들이 세월을 낚고 빨래터에는 시린 손 곱아진 여인들의 애환도 흘렀다. 전쟁 지나간 진주는 첫 남강다리와 촉석루를 잃었지만 지금 그 강에는 희망교, 천수교, 진주교, 진양교, 상평교, 김시민대교, 남강교, 금산교가 줄줄이 섰다. 다시 세운 촉석루는 예전처럼 남강을 내려다보고 장어골목 유명했던 성문 앞 거리는 또다른 변신을 준비중이다.
진주를 품은 남강이 천년을 한결같이 흐르는 동안 강가에서 물놀이 하던 우리네 삶은 나이를 먹었다. 논개의 순국이 이름을 드높이고, 산홍의 기개가 전해오는 곳, 형평사의 이념이 올곧은 도시. 진주는 그런 도시였다.
오늘의 청춘들이 만나보지 못한 진주라는 옛 이야기. 어머니 아버지의 오래된 앨범에서 그네들의 청춘시절을 만났다. 빛 바랜 풍경사진에는 사연도 많더라. 김지원 미디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