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사진이 탄생하기까지 발로 뛴 역사
보도사진이 탄생하기까지 발로 뛴 역사
  • 최창민
  • 승인 2016.10.11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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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사진보도 히스토리-1989년 11월 복간 이후를 중심으로
▲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촬영한 스포츠 사진을 보도한 화보.
신문사의 사진마감은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한 사진을 본사 화상서버로 전송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 어디서든 사진을 촬영하고 그 즉시 전송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러나 25∼26년 전만해도 사진마감을 위해 취재현장사진을 전송하려면 많은 제약이 따랐다. 사진을 촬영하는 것에서부터 필름을 현상·인화하고 전송기를 통해 본사에 전송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전쟁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 수 십장의 초고화질 사진을 눈 깜짝하는 사이에 보낼 수 있는 디지털 세상,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본보는 창간 107주년을 맞아 1989년 복간 이후 사진기자가 본사에 사진을 마감한 사례를 중심으로 ‘경남일보 신문사진 전송 히스토리’를 엮어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상> 사진 전송의 전환점 16-S, AP사 리팩스(LEAFAX)등장
<하> 필름의 종말, 디지털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


◇전서구(傳書鳩) 사진전송 스토리

새를 이용한 이른바 ‘전서구 신문사진 마감’은 전설로 남아 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활용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1936년 8월 비둘기가 사진필름을 송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 이종옥을 비롯 학자들 33명으로 구성된 백두산 탐방단이 8월 13일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이 사실은 이틀 후인 15일자 1면에 만세삼창 사진과 기사가 보도됐다. 기사 바이라인(by-line)에는 ‘백두산정발 전서구편=삼장중계’(白頭山頂發 傳書鳩便 = 三長中繼), 즉 백두산에서 비둘기를 통해 송고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훈련된 비둘기를 데려가 필름을 맡겨서 사진을 마감한 것이다.

 
▲ AP통신사의 초기 사진전송기와 AP사의 리팩스35 전송기


◇경남일보 복간기(1989년 11월 25일)

본보는 1989년 11월 25일 지령 9343호 신경남일보라는 이름으로 복간됐다. ‘바르고 밝고 참된 애향’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1면에 실렸다.

당시 신문사진은 특집이나 특별한 날 1면 메인사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흑백사진을 실었다. 창간호 1면 사진은 컬러가 아니었지만 특집판 8개면 표지는 컬러로 제작됐다. 이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색분해와 사전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에서 마감시간 전에 본사 서버로 사진을 보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지에서 현장사진을 취재해 필름을 버스나 기차 편으로 통째로 보내는 수준이었다. 전달된 필름은 본사에서 현상·인화한 뒤 데스크로 보내졌다. 그러니까 현장 마감 후 두 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본사에 마감이 되는 배달시스템이었다.

복간 후 이듬해인 1990년 충북에서 개최된 전국체전을 계기로 획기적인 변화가 왔다. 10월 15일부터 21일까지 청주에서 제71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본보에서는 취재·사진기자가 파견됐다. 기사는 원고를 써서 팩스로 보내면 됐으나 사진전송이 문제였다.

개회식 장면 사진을 촬영한 뒤 사진관에서 현상·인화한 뒤 청주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가 운전기사에게 부탁해 보내기도 했다. 이런 사진들은 뒷날이나 이튿날 화보로 싣는 것이 관례였다. 실시간 현장사진은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전국체전 종합상황실 지방기자실에 AP사의 드럼전송시스템이 등장했다. 16-S<사진>라는 사진 전송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기계는 인화한 사진을 16-S 드럼에 부착한 뒤 회전시켜 전화회선을 통해 본사에 전송하는 시스템이었다. 흑백사진 1장에 15분, 컬러사진 30분이 소요됐다. 드럼이 작다보니 전화 요금과 마감시간을 줄이기 위해 사이즈가 작은 사진 두 세장을 엮어 붙여 작동하는 과욕을 부리기도 했다. ‘삐리릭∼삐리릭’ 전송음이 나 시끄러울 법도 했는데 이를 시비하는 사람은 없었다. 화질이 좋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이 시스템은 중앙일간지 외 지역 언론사에는 보급이 많이 되지 않았다. 수입업체 직원들이 전송기를 판매할 목적으로 기자실에 파견돼 서비스를 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부 기자들에게 전송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일부 사진전송업무도 도와주었다. 이 덕분에 26년 전 전국체전에서의 역동적인 스포츠사진을 익일 신문에 게재할 수 있었다.<사이클 사진>

한가지 더 덧붙이면 이때 현장에서 촬영한 필름을 현상·인화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사진을 만들 수 있는 약품과 암백, 심지어 사진 확대기까지 현장에 들고 가는 수고를 감수해야했다. 이후 전국체전에서 수년간 이런 식의 고된 사진전송작업이 계속됐다.

◇1993년 초 AP 리팩스(LEAFAX)도입

본보는 1993년 초 한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고가의 첨단 AP리팩스를 도입했다. 이 역시 전화선을 통해 전송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사진인화 단계가 사라지게 돼 작업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 촬영한 필름을 암백과 암통에 넣어 현상한 뒤 네가티브 필름을 바로 AP리팩스 캐리어에 삽입해 전송하는 시스템이었다.

소형 아날로그 컬러 모니터가 탑재돼 있어 모니터를 보면서 트리밍과 보정작업을 할 수 있었다. 전송시간이 절반으로 준 것이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최상급화질의 사진을 같은 시간에 두배로 보낼 수 있어 본사에서도 사진을 골라서 쓰는 여유도 생겼다.

반면 컬러사진 전송은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이로인해 발생하는 과다한 통신료가 문제였고 또 한손에 들고 다닐 수 있기는 해도 무게가 20kg에 육박해 이동시 팔이 빠지는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했다.

하지만 AP리팩스의 등장은 사진전송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기자들이 보다 신속하게 사진을 전송할 수 있게 됐다. 본보에서 이 장비를 도입한 것은 사진전송기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면에는 짧은 시간에 컬러 색분해가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작업을 병행하기위한 것이었다.

 
▲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촬영한 스포츠 사진을 보도한 화보.


◇1993년 11월 성철 큰스님 선종 때의 어려움

1993년 11월 4일 합천해인사에서 성철스님이 선종했다. 해인사가 진주 본사와 거리가 있고 교통사정이 좋지 않아 전송기가 처음으로 사용됐다. 성철 큰스님 선종을 취재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언론사가 해인사에 집결하면서 북새통을 이뤘다.

사찰 내 자체적으로 마련한 기자실은 지역지 몫이 아니었다. 결국 해인사 앞 일반 가정 주택에서 전송기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주인들이 흔쾌히 허락했으나 길어지는 전송시간에 과다통신료 문제가 발생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결국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사진을 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길가에 서 있는 애먼 공중전화를 뜯어내 전화회선을 확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큰 스님 선종 후 다비식이 열리는 날 비가 내리는 등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아 사진 전송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제12회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의 사진전송

1994년 10월 2일부터 16일까지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일본에서 열렸다. 해외취재에 최신형 AP리팩스 전송기를 지참했다. 바다건너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흥분으로 바뀌었다.

최대의 관심이었던 축구 한·일전 경기를 사진 취재했다. 한국축구대표팀은 이날 홈팀 일본을 맞아 유상철이 1골, 황선홍이 2골을 터트려 3-2로 승리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비록 준결승전에서 우즈베키스탄에 0-1로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으나 숙적으로 떠오른 일본을 이겼다는 것만 해도 감격이었다. 3, 4위전에서 쿠웨이트에 패해 4위를 했다. 대한축구협회회장이던 정몽준회장과 히로시마평화공원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농구경기에선 이란전에 출격한 현주엽이 펄펄 날았다. 레슬링에선 양영진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본사에 사진을 보내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일본의 물가가 워낙 비싸 통신료가 선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의 어두운 밤에 20㎏에 달하는 무거운 전송기를 들고 다녔던 기억은 잊지 못할 일이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진행 중이던 중간에 귀국해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한국선수들의 모습을 화보로 보도했다. 기대와 설렘이 교차했던 해외에서의 사진전송은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귀국 후 컬러화보를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사진>



◇울산 현대자동차의 파업사태 사진 전송기 역할

울산이 경남도에서 분리되기 전 시절, 본보는 울산지역까지 원정취재를 갔다. 언론 자유화로 우후죽순 생겨난 각 언론사들은 신문사명을 새긴 차량과 전송기 카메라 등으로 사세를 뽐내던 시기였다. 현지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사진을 보내기가 어려워 지원요청이 들어왔다.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의 파업사태가 장기화되고 있었다. 이때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 전송기였다. 현대자동차 노조활동은 격렬했다. 그런 만큼 경찰의 진압방식도 전쟁수준이었다.

헬기를 이용한 선무방송, 해산을 요구하는 전단지 살포, 경찰차량의 사이렌 소리가 며칠 동안 울산시가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전국에서 집결한 경찰 전 병력이 상상을 벗어난 작전을 펼쳤다. 경찰은 외부에서 현대자동차 담벼락을 동시에 허물더니 공장내부로 진입하면서 노조원들과 충돌했다. 늦은 시간까지 경찰과 노조가 일촉즉발 긴박하게 대치했던 상황은 사진 전송기 덕분에 마감이 가능했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 1990년 10월 전국체전이 열린 충북 청주에서 본사에 전송한 사이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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