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6)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1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6)

세 사람의 큰무당 밑에서 허드렛일을 맡은 늙은 무당이 짚단에다 불을 질러 놓고 언니의 혼백을 실은 광주리며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둘과 무색 옷가지, 버선과 꽃신을 날름거리는 불길 속에다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께로 다가가 손짓을 하는 것이 골분의 처리를 상의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여기까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상기해 낸 양지는 둑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종이에 쌓인 조그만 꾸러미를 집어 들던 아버지가 양지를 바라보았다.

“이거요.”

양지가 내미는 밥덩이를 보자 아버지는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모여 있던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둑 위로 쏠렸다. 양지도 아버지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모아진 둑길 끝에서 허우적거리는 맹렬한 동작으로 아이 하나가 달려오며 다급하게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불이 났어요!, 불이, 불이 났어요!”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일부러 양지의 앞까지 뛰어와서야 요란한 풍물소리 속에서 아이가 외쳤다. 조무래기 몇이 더 마을에서 이쪽으로 뛰어오며 좀 전의 아이와 똑같은 동작으로 화급한 어떤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한 여자아이의 “서울언니, 쾌남이”

그런 단어는 분명히 양지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거였다. 양지는 네 발 짐승처럼 벌벌 기어서 강둑 위로 올라갔다. 둑 위에는 아까 없었던 북덕바람이 겨울 특유의 냉기류를 형성하며 분탕 치듯 휘몰아치고 있었다.

불이 나다니. 순간 양지의 뇌리에는 타다 남은 화톳불과 어지럽게 널려 있던 마당의 지푸라기며 허접스러운 물건들을 소각시키기 위해 텃밭에다 어머니가 따로 피웠던 불땀 좋게 너울거리던 불길이 상기되었다. 비록 실수로 흘린 작은 불씨일지라도 아이들이 요란을 떨 정도로 큰불이 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전처럼 잽싸게 어떤 화급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상실된 환자였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집을 다 태우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은 이미 본채를 빙 둘러서 타오르고 있었다. 고가의 마를 대로 말라 있는 기둥과 서까래며 흙벽. 좋아라고 우글우글 떼거리로 기어오르는 불의 아귀들. 수천수만의 붉은 뱀이 다투어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탐하느라 맹렬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큰 뱀은 작은 뱀을 먹고 작은 뱀은 뱀대로 큰 뱀을 먹기 위해 다투어서 자꾸자꾸 무리 지은 뒤를 잇고 또 잇는다. 수많은 뱀들의 이빨에서 흘러내린 선혈로 빨갛게 물들어 버린 집. 하늘로 치솟을 검은 연기도 별로 없이, 곱고 붉은 한 송이 거대한 꽃이 피어나는 순간처럼 불꽃은 부풀어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