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7)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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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7)

주위는 어두웠고 전신은 축축한 것으로 무겁게 눌려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어떤 소란스러움도 느껴졌다.

“아, 비!”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투두둑,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는 빗물이 끄나풀 같은 긴 빛을 내며 이불 밑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다 망연한 눈길로 구들이 우묵하게 내려앉은 낮은 곳을 향하여 뱀처럼 기어가고 있는 방바닥의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조상들의 얼이 배인 집인데 어느 자손이 있어서 수리해 가면서 지킬꼬.”

잡초가 돋아 있는 찌그등한 기왓골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젖은 빗소리 속에서 양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아래채의 방 같지 않은 방은 양지의 고집을 못 꺾은 고종오빠의 주선으로 임시 수리를 했지만 미처 손보지 못한 지붕은 빗물을 먹은 만큼 쳐져 내리기 직전이다.

아래채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무섬증을 왈칵 느낀 양지는 얼른 웃옷을 걸치고 나와 비 내리는 캄캄한 어둠 안으로 달려들었다. 적막하게 산천을 휘감는 바람소리에 귀신의 울음소리 마냥 음산한 나목의 떨림이 전해졌다. 어둠에 눈이 익자 불타 버린 집터의 황량함이 더욱 아프게 시야로 끌려들었다. 터질 것 같은 울음보를 안고 고독이 밀려들었다.

양지는 온 얼굴로 빗줄기를 받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허무했다. 이 허무감의 원인이 무엇인가. 울컥, 찌르르 목젖을 역류해서 솟구쳐 오른 무엇이 비강을 아리게 했다. 순간 핏발선 양지의 눈길 속으로 섬광이 일어났다.

박차듯이 어둠을 헤쳐나간 양지는 경황 중에 아무렇게나 챙겨둔 짐짝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어머니의 손길로 곱게 수습된 족보 꾸러미였다. 지질은 푸석푸석 보풀이 일었고 검거나 누렇게 심한 얼룩이 졌다. 일부러 꺼내보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지내도 그만인 오래된 낡은 서책일 뿐인 것이었다.

양지는 아궁이 가득 쏘시개를 넣어 불을 지핀 뒤 한 권 한 권 낡은 책을 던져 넣었다. 아들이 없었으니 아버지 이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책을 안한 것으로 인해 더욱 화근이 되었던 물건이다.

불땀도 없이 책은 조금 저항하다가 이내 불길 속에서 자취를 감추곤 했다. 어서 어서 불타서 없어지면 이 집에 드리워져 있던 주술의 검은 막이 걷혀지기라도 할 것처럼 줄기차게 열심히 책을 태워 없앴다.

그러는 동안 양지의 양 볼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한 많은 가족사에 대한 보복 행위였지만 유쾌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았다.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살았을 때 정남이가 살았을 때 아니 그보다 더 훨씬 이전에 이런 결행을 하고 가문에 대한 선대의 망령에서 벗어났으면 무슨 계기가 만들어졌을까. 이제야 이런 치졸한 결행을 하게 된 데 대한 자괴감만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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