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8)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8)

아침에는 멀쩡하게 날이 개었다. 늦은 시각까지 이부자리 속에서 뒹굴고 있으려니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또 먹을 것을 가지고 고종오빠가 왔는가. 오빠라면 오토바이 소리가 났을 것인데 듣지 못했다.

아버지인가? 발자국 소리가 그리는 행동반경을 가늠하며 양지는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멀어졌다. 그러나 아주 지나가는 걸음인가 여기는데 다시 들리는 발소리. 그녀는 간밤에 비가 흐르던 젖은 벽의 얼룩을 올려다보는 한편 이 집에 와서 서성거릴 사람으로 의무적인 인사라도 표시해야 될 사람은 누구인가 꼽아보았다. 또 현태가 왔을까. 염치없는 기대가 실려 있는 것 같아 얼른 지워버렸다. 뒤늦게야 어머니의 불상사를 들었다며 숨 가쁘게 달려왔던 현태는 적막강산에서 양지를 구해내야 될 의무를 느낀다며 다시 결혼 진행을 서두를 것을 설득 했지만 역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이제 깨끗이 단념한다는 말을 뱉고 떠나갔다. 물론 고종오빠의 강력한 권고도 있었지만 저 하나의 개인적인 행복을 찾겠다고 이 지경이 된 집을 나 몰라라 떠나는 짓을 양지의 양심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불탄 집터 주위를 배회하던 발소리는 다시 그녀가 있는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양지는 치우지 않은 빗물받이 대야를 얼른 끌어당겨 걸레며 세탁물들을 담아서 가렸다.

“어머 이뻐라. 웬 국화가 아직도 이렇게 탐스러울까?”

안에서 들으라고 일부러 내는 큰 목소리, 명자였다. 양지는 문득 뒷벽에 붙어있는 작은 봉창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동구 밖에서 돌려보낸 후 처음이다. 더욱 전 같지 않을 만남이었지만 지금은 작은 봉창 구멍으로 도망을 갈 수도 없으니 피하자 피할 수도 없다.

얼마를 더 망설이고 있다가 더는 비굴해지기 싫어 심호흡을 가누며 문을 열었다. 텃밭가장자리에서 사립으로 연이어 아직 피어 있는 갖가지 색깔의 국화 덤불 옆에서 명자가 돌아보았다. 양지와 얼굴이 마주치자 털 코트를 걸친 몸을 동그랗게 구부리고 꽃 한 송이를 다시 똑 따더니 코에다 대고 양지 앞으로 걸어왔다.

“얘 어떻게 하니”

설명하지 않아도 양지가 그 동안에 겪은 모든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음이었다. 양지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장면은 자신이 당하고 싶던 경우가 절대 아니었다. 투명 막에 갇힌 듯이, 떠나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아래채의 허물어진 외양간 방을 거처삼고 있는 몰골이란 정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웃에서 가져다 준 취사도구며 침구들…. 빗물이 흘러내리던 흙벽과 어우러져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방안을 명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계속 둘러보고 있다. 양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명자가 장난삼아 뜯어서 내려뜨리고 있는 꽃잎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입을 열면 이 처량한 모습의 긍정이 될 것 같았다.

“너 이러고 있는 줄 알아서 뭐든 좀 준비해 오는 건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