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9)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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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9)

침묵이 버거운 듯 명자가 먼저 무슨 말이든 자꾸 건네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양지가 싫어하는 부분을 들춰내어 조문이랍시고 다시 들먹거리지는 않았다.

“그래 뭘 좀 먹기나 했니? 일나 봐라. 볼썽사납게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을 거니”

양지는 뜨거움이 화끈해지는 눈시울을 비비며 이제 가야지, 짧은 대답을 했다. 그래 놓고 나니 아무래도 미흡한 것 같아 잠긴 목젖을 풀고 소리 나게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이제 갈 거야, 모두들 어서 오라고 야단인데”

“아니 너 있고 싶은 대로 있어도 돼. 그걸 확인하러 온 게 아니야”

명자의 저 배려 속에 깃든 뜻은 무엇인가. 이제 경쟁자가 못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양지는 어디로든 몸을 숨길 수 있는 틈이 있으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은 간절함을 누르고 있다.

“이 집 우리가 도로 샀으니까. 그 업자들이 우리 기철이 말 듣고는 쉽게 승낙하더란다. 계약금은 배로 물려줬지만 그거 따져서 뭐 하겠노”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옷에 붙은 꽃잎을 탁탁 털어 내다가 명자는 웃었다. 그러다가 양지와 눈길이 마주치자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땅한 말이 골라지지 않아 애쓰는 양을 보였다.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 집의 소유자가 그들로 바뀐 것이 확인된 순간의 기분은 묘했다. 초라해 보일 몰골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앞에 있는 이 여자가 성남언니라면….

양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또 하늘을 보았다. 성남이, 명자 그들은 단짝 친구였다.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성남이어도 상관없고 명자여도 상관은 없다. 그들 가난한 집의 장녀들은 하나같이 집안의 장래를 걱정하며 성장했다. 언니도 그렇게 어이없이 꺾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명자처럼 어떤 방법으로든 성공을 꾀했을 것이다. 명자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있음일 것이다. 설령 그녀의 성공을 흔쾌하게 용인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면 안 된다. 최 양지는 명자가 생각하는 그런 류의 품격 낮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럴 때 더욱 보여주어야 했다.

양지는 비로소 문턱을 내려서며 신발을 꿰어 신었다.

“잘했어. 난 이럴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되지? 언니가 지금 나한테서 듣고 싶은 말은 뭐야?”

“얘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어. 영화 속에서처럼 복수라는 말을 입에 올려도 괜찮아. 그게 언니의 삶을 향상시킨 힘인 걸 인정하니까.”

“그러니까 또 말 되네. 야, 이 가시나야, 너 참 멋있다. 전에도 그랬지만 배운 년이라서 그래도 뭐가 다르네. 성남이 그 가시나만 살아 있어도 정말 한 번 으시대고 싶은데. 그 계집애가 사실은 얼마나 날 약 올렸는지 모르지? 내가 가여워서, 도와주지 못해서, 저는 뭐 그리 유복하고 넉넉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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