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발길닿는대로 (87)예림서원을 찾아서
윤위식의 발길닿는대로 (87)예림서원을 찾아서
  • 경남일보
  • 승인 2016.11.0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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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세월의 저편에서 책읽기를 으뜸으로 삼았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께서 관직을 접고 향리로 돌아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여 유림들과 후손들이 선생의 충의지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예림서원의 독서루에 올라서 선현들의 서책 내음이라도 맡아볼까 하고 가을빛이 짙어진 산야도 섭렵할 겸 밀양의 예림서원을 찾았다.

남해고속도로 동창원 요금소를 나와 밀양으로 이어지는 왕복 4차선의 25번 도로로 들어섰다. 진영 단감의 가판매점이 길섶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서 단감 주산지의 옛 명성을 잃지 않고 고운 빛깔로 단 내음을 풍기는데 이어지는 길은 언제부터인가 널찍널찍한 주차장을 앞에 두고 온갖 브랜드의 의류매장들이 늘어서서 찬란한 조명등의 불빛들이 한낮인데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어 도심상가를 방불케 한다.

상가거리의 양편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들녘이 무한한 공간을 한껏 자랑하는 대산들녘이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수산대교에 올라서면 대산들과 수산들녘이 어우러져 한량없는 대평원의 광활한 평야가 사방으로 펼쳐져서 가슴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시선의 끝점이 없어 외로운 나그네는 망망대해의 점 하나에 불과할 뿐 미물의 초라함이 ‘나’인 줄을 느끼게 한다. 지금 찾아가는 예림서원에 배향한 김종직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제자 정여창 선생은 자신은 한 마리의 좀 벌레에 불과하다며 호를 일두라 하셨으니 이 몸은 한 점 티끌먼지에 지나지 않으니 일진(一塵)이라 하여도 과분한 것일 게다.

끝없는 광야를 달려서 밀양들머리인 밀양강 예림교 앞에서 좌회전을 하여 강변길을 따라서 길머리를 돌렸다. 2~3km 남짓한 거리의 후사포교차로에서 다시 좌회전해 사포초등학교 앞을 지나 마을초입으로 들어섰다. 가을걷이로 어수선한 밭이 띄엄띄엄하게 널려 있는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가지런하게 담장을 두른 맞배지붕의 비각이 세월에 빛이 바래 고색창연한 옛 내음을 풍기며 길목을 지키고 있어 발길을 멈췄더니 ‘박양춘 여포비각’이라는 안내판이 섰다. 임진왜란 중에 북상하던 왜장도 효행에 감복해서 침범하지 못하게 마을 입구에 표식을 세웠다니 짐작이 가는데 백세의 교훈을 삼고자 정여각을 세우고 정조 때 ‘삼강록’에 행실을 상재하고 이조참의의 벼슬을 추증했다고 안내판이 일러주니 금세와의 격세지감이 하늘과 땅 차이임을 실감케 한다.

마을 안으로 들자 빤하게 대궐 같은 기와지붕이 산자락을 깔고 용머리를 길게 뻗으며 가지런 가지런하게 산중턱의 높이로 한 일자를 그었다. 널따란 주차장이 상하 두 구역으로 층을 이뤄 시원스럽게 펼쳐진 축대위의 2층 문루는 ‘독서루’라는 하얀 현판을 달고 우뚝하게 솟았다. 예림서원의 삼문문루이다. 열려진 협문으로 들어서자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당우가 마주보는데 오른쪽에는 서적을 열람하는 곳인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집목판과 부친 강호 김숙자 선생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을 모은 ‘이존록’ 목판 262매가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75호로 보존돼 있다는 ‘열고각’ 이고, 왼쪽은 유생들이 기숙하는 곳으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몽양재’ 라는 현판이 붙었다. 다시 돌계단을 밟으며 축대위로 올라서면 또 하나의 널따란 마당을 마련하고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으로 ‘돈선재’와 ‘직방재’가 동재와 서재로 마주보고 섰다. 동재와 서재를 좌우로 거느린 정중앙으로 정면 6칸의 웅장한 목조건물은 역사의 향기를 그윽하게 머금고 ‘예림서원’이라는 편액을 달고 근엄하게 앉았다.

예림서원은 조선조 명종 22년에 밀양 유림들의 요청과 퇴계 이황 선생의 조언으로 영원사 옛터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이라고 했다가 이후 퇴계 선생은 김종직 선생을 배향하고 점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친필 편액을 써서 걸었다는데 인조 13년에 이곳 예림으로 옮겨짓고 원호를 예림서원으로 바꾸고 오졸재 박한주, 송계 신계성 선생을 함께 배향하고 현종 10년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돼 충효절의의 유훈과 학덕이 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이다. 널따란 대청마루는 세월의 흔적이 결결이 묻어나는데 유생들의 교육과 회합, 토론의 장소로 ‘구영당’이라는 또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의 뒤를 돌아가 층층석계 위로 ‘정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내삼문인 솟을삼문을 들어가자 화려한 단청의 삼 칸 맞배지붕의 사당인 ‘육덕재’가 근엄하게 높이 섰다. 중앙으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좌우에는 오졸재 박한주 선생과 송계 신계성 선생을 배향했다. 큰절로 예를 올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조의제문으로 정녕 망자인 세조와도 맞서려 하셨습니까? 함양의 학사루에 붙은 유자광의 한시주련을 불살라버리고도 후한의 염려도 않으셨습니까?” 조심스레 여쭈며 머리를 조아렸다. 500여년 숨결이 오늘로 이어진다. 사초에 올려 선생을 찬하려 했던 제자 김일손인들 무오사화의 불씨가 돼 역사를 피로 물들일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선생이 남기신 대쪽 같은 절의가 준엄한 가르침이 돼 가슴을 저려온다.

선생님의 발자취가 못내 그리워서 생가인 추원재로 발길을 돌렸다. 후사포교차로로 되돌아 나와 좌회전을 하여 연이어 제대교차로에서 추원재를 알리는 표지판의 길안내를 따랐다.마을 입구의 외딴 길목에 단청이 화려한 큼지막한 비각이 우뚝하게 솟아 있어 당당한 풍채가 예사롭지 않아 차를 세웠다. 비각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희끄무레한 빛깔의 비석이 장엄하게 버티고 섰다. 고대광실 대청마루에 정자관을 쓴 도포차림의 정승판서의 근엄한 자태를 보는 것 같아 멈칫 하고 옷깃을 여몄다. 이수문양이 조각된 커다란 머릿돌과 귀부 받침돌을 한 석비명은 ‘문간공점필재김선생신도비명’이라는 전서체가 또렷하게 새겨졌다. 건립 시기가 인조의 재위기간이라 시호를 문간으로 기록돼 있으나 이후 숙종 15년에 증직 영의정으로 문충공의 시호를 받으셨다. 경건함을 다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추원재를 찾았다.

널따란 주차장을 마련하고 작은 공원을 가꾸어서 선생의 흉상이 우뚝하게 높이 섰고 대문 안으로 4칸의 맞배지붕이 추원재라는 현판을 달았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신 강호산인 김숙자 선생께서 처음 거처를 정한 고택으로 아들 김종직 선생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옛집으로 경남도문화재자료 제159호이다.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길재에게 아버지 김숙자가 이어받고 다시 아들 김종직으로 잇게 하여 뒤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맥을 이뤘다. 영남 사림의 종조이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훈이 젖어오는 것일까, 옛 내음 옛 정취가 온몸을 흠뻑 젖게 한다. 추원재 마루청에 걸터앉았다. 파랗게 높아버린 가을 하늘에 기러기 떼가 가지런하게 줄지어 날아간다. 만대불후 선생의 지조와 학덕이 창공에 드높다.

 


김종직선생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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