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2)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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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2)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대.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때문에 호적에 성씨를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두어야 하므로 쉬쉬하는 집이 더 많단다. 재미있는 건 우리나라 성씨 중에 왜 김이박의 숫자가 많은지 모르지? 일제가 민적법 시행 때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를 호적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일례로 누구라 하면 언니도 들어봤을 장군 댁 노비 백여 명도 한꺼번에 주인 댁 성을 따서 호적에 올렸단다. 일제가 천민들에게 성씨와 호적을 부여한데 따른 음모가 뭐였는가 하면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고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 정책과 맞닿아 있다는 게 연구 결과야. 현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 집의 마당쇠였거나 그 동네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다는 우스갯소리도 있고.“

숙지근한 기색으로 양지의 말을 듣고 있던 명자가 중간에서 파르르 화를 내며 끝나지 않은 말을 잘랐다.

”그래, 니 유식한 건 잘 아는데, 무식한 년 앞에서 강의하는 기가 뭐꼬. 그래서 우짜란 말이고?“

듣고 보니 예를 든 사설이 길었다 싶었지만 안할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아 양지는 속이 시원했다.

”뭐 어쩌긴 어째. 우리 언니가 우리 아버지한테 퍼붓던 말대로 조상들 뼈나 우려먹고 사는 인간들치고 변변히 사람 노릇 하는 사람 없는데, 우리는 그런데 얽매일 필요 없이 잘살자는 말이기도 하고. 꼭 덧붙이자면 언니네 부자잖아. 다음 말은 내 입으로 꼭 안 해도 될 거고.“

”야이 가시나야. 니가 바로 뜨거운 감자네. 이 밉상시런 년, 독한 차돌맹이 같은 저 년을 내가 우찌 잡아 묵을꼬. 니가 운재꺼정 그리 꼿꼿이 고개 쳐들고 버티는지 두고 보자 이년아.“

화가 난 깐으로 치면 작살내고 싶은 상대를 어쩔 수 없이 씨근덕거리며 노려보던 명자는 쌩하니 발길을 돌렸다. 가다가 뒤돌아보는 안색이 부푼 성화만 더친 듯 하더니 기어이 종아리까지 올라 온 가죽부츠 신은 발길로 눈에 보이는 국화덤불을 이리저리 걷어차 놓고 멀어졌다



이제는 떠나야 한다면서도 자고새면 그 계획은 다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터를 정비하기로 했다며 명자네가 일러 준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양지는 이제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아주 이곳을 떠날 각오를 했다. 그러나 마음의 뿌리는 생각대로 선선히 몸을 따라 나서지 않고 자꾸만 쳐져 내렸다.

떠나지 못하는 마음에 이유라도 제공하듯 며칠 째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불타서 을씨년스런 주위 경관을 덮어주는 참 고마운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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