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8)
“오빠, 쟤들 어떻게 해요?”
“이혼이라 카는기 말대로 그리 쉽것나”
“저 표정을 보세요. 그 통보를 하러 벼르고 있었던 지도 몰라요”
“잘 모르기는 해도 자식까지 낳고 살면 지하고 싶은 대로 다 몬 하는 기 에미 애비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아요”
비단 오빠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양지 역시 어머니의 친구들을 통해서 노인들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육십 대 이상 되는 어른들, 특히 안노인들, 게다가 시골 노인들은 자기들의 노후대책은 전무하다시피 자식들한테 평생을 쏟아 넣었다. 그리고 그 보은의 고리는 동식물이 아닌 인간만의 자존적 미덕이므로 부모가 자식을 안 믿고 누구를 믿을까 보냐는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 하에서 문젯거리와 논점의 상충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복지정책만 잘 실천되면 아들 딸 차별도 없어진다는 결과는 어느 토론회서나 결론이 되지만 충족할 수요대로 보급은 아직 요원할 뿐이다. 앞으로의 선진국은 경제대국이 아니라 복지정국이라고 학자들 입으로는 강조되면서도 말이다.
가진 자들은 문제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가진 자들의 머리와 입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을 모르는가. 가진 자들의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모순성을 알면서도 모두들 가진 자가 되려고 발버둥 친다.
앞으로의 세상은 박사가 아니라 덕사가 최고인 세상이라야 한다고 의식 있는 이들은 말한다. 그러나 양지는 앞으로 있을 남녀를 축으로 이끌어지던 사회생활의 심각한 지각변동을 안다. 정남이 딸의 양육 때문에 현태와의 사이가 파토 난 것만으로도 뚜렷해진 징후를 체감한 것이다. 여자들이 가진 자가 되는 세상, 그 도도하게 물결쳐 오는 흐름 가운데 양지 자신도 서 있다.
“그래도 호남이만은 잘됐으면 좋겠어요”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