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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01)<160>의로운 시인 윤동주와 경남의 인연(2)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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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4  22: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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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는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 교수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내었다. 오늘은 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과의 기숙사 생활이나 더 나아간 일과에 대해 정교수의 증언을 들어보고자 한다. 연희전문 2회 후배인 정병욱은 나라사랑 23집(외솔회,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 재인용)에다 다음과 같이 추억해 내고 있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생활의 대중을 동주로 말미암아 다져갔고 시골뜨기 때가 동주로 말미암아 차차 벗겨져 나갔다. 책방에 가서 책을 뽑았을 때도 그에게 물어보고야 책을 샀고, 시골 동생들의 선물을 살 때에도 그가 골라주는 것을 사서 보냈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들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나를 이끌어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 그 두어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가끔 입을 열면 고작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 있어요?’ 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연희전문 3학년 때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내 고장이 남쪽하고도 지리산 기슭의 산골이었기 때문에 어려서 교회당이라고는 구경도 한 적이 없었고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교회의 문턱이라고는 넘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던 나는 동주의 꽁무니를 따라 주일날이면 영문 모르고 교회당엘 드나들었다.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협성교회로서 이화여전 음악관에 있는 소강당을 교회당으로 쓰고 있었다. 거기서 예배가 끝나면 곧 이어서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는 영어 성서반에도 참석하곤 했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나가는 교회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는데, 그 이후에도 교회를 나갔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 어쨌거나 연전 3학년때는 윤동주가 신앙에 회의를 했었다고 송우혜의 ‘윤동주평전’에서는 기술하고 있다. 그 까닭에 대해 그 평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몸소 겪고 있던 처참하고 치욕적인 시대상황에 절망했다. 그는 한민족의 언어와 글을 갈고 닦을 것을 그의 필생의 목표로 정했고 거기에다 온 심령을 기울여 온 문화인이었다.(중략) 인간이 인간을 그토록 사악하고 처참하게 능욕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묵인하고 또 침묵하고 있는 신을 생각했고, 결국 그러한 신의 존재에도 역시 절망했다.”

그런 시기에 정병욱이 윤동주를 따라 교회에 가서 영어 원서로 된 성경 공부를 했던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4학년때는 두 사람 다 기숙사를 나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이때의 일을 역시 나라사랑 23집(재인용)에 있는 내용을 읽기로 한다. “그 무렵 우리의 일과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나갔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이들은 그런 뒤 고서점이나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기도 했다. 오는 길에는 명치좌(극장)에서 재미 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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