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82)
추 여사는 그럼 나를 그 집 며느리로 들여앉히려던 자신의 뜻이 빗나간 데 대한 불만으로 집을 나간 것일까. 그렇다면 그 사람 추 여사는 내게 무슨 기대를 하였다가 실망한 나머지 그토록 단단하던 끈을 놓고 슬그머니 잠적해버린 것일까.
그러나 양지는 생각을 고쳐먹고 지나친 부담감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기로 했다. 추 여사는 외로운 사람인 자신의 처지대로 외로운 사람을 이해하고 좋아한 것뿐이야. 운명적으로 내 것이 아닌 것에 미련을 갖다 보면 사람만 초라해질 뿐이다. 직장을 비우고 고향에 발이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와의 우여곡절을 밝혀 보아야 동정 밖에 더 사겠는가 싶었던 공백이 너무나 크게 드러났다. 양지는 더 이상 그들로 인해 불쌍해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도 곧 사표를 내기로 마음 가닥을 잡았다.
호남의 부추김으로 조금 되찾을 기미를 보였던 생기는 또 다시 가라앉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자신을 꾸짖어도 되지 않았다. 쳐져 내린 마음은 도약할 발판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순간 솟구칠 저력마저 따라주지를 않았다. 양지는 부모형제도 사라져버린 폐허의 빈터에 혼자 오뚝하게 앉아있는 자신을 돌아보니 ‘괴물’이라고 이죽거리던 현태의 독설이 사실로 자신의 정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끝없이 외로운 상념의 벌판에서 헤매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질적인 음운이 끼여서 같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 종소리. 용연사….
17
매생이 국에 수제비를 띄운 것 같은 하늘. 그 아래 눈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지저귀고 있던 멧새 여남은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날아올랐다.
양지는 걸음을 멈추고 가지에 올라앉은 새들을 담쑥 감추어 주는 검은 솔숲을 바라보았다. 희디흰 음지의 눈빛에 반사되어 소나무들은 푸른빛보다 검은빛에 가깝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듯 아늑하게 둘러쳐진 산줄기에 에워싸인 골짜기의 겨울 햇살은 틔듯이 재재거리는 산새 소리에 어울려 구슬처럼 영롱하고 싱그러웠다.
양지는 부신 눈을 감으며 아예 쭈그리고 앉아서 산골 가득한 새소리에 귀를 맡겼다. 머릿속으로 가득 들어온 새소리에 자신을 묻고 있노라니 마음이 한결 단순해지고 정갈해졌다. 아울러서 가슴에 안은 국화꽃다발에서 피어 오른 진한 향기가 이승을 초월한 향기로움으로 그녀의 후각 깊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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