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4)
  • 경남일보
  • 승인 2016.11.29 17: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4)

촉촉하게 젖어있는 땅에 비질 자국도 선명한 마당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듬성듬성 디딤돌이 늘어 놓여 있고 그 끝에는 신도들이 드나들게 되어있는 법당의 옆문이 있다. 양지는 법당 앞에 이르러서야 꽃다발을 하나밖에 만들어 오지 않은 것에 생각이 미쳤다. 어머니라면 분명히 여기 와서의 일까지 미리 염두에 두고 준비했을 것이었다.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에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가꾼 꽃을 바쳐야하겠으나 양지의 마음은 어리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산신각으로 더 기울었다.

낮은 추녀에 걸려있는 물고기 모양의 풍경을 쳐다보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법당 앞의 축대에다 꽃다발을 놓고 내려섰다. 그리고는 산신각이 있는 비탈길로 걸음을 내디뎠다.

‘용연사 산신님은 예전부터 영험이 있으시다고 소문이 짜했단다. 한창 사람이 든발난발 할 때는 법당보다 산신각을 새로 짓네 어쩌네 했다만 절에서는 부처님이 최고라고 반대를 하고 야단이더란다.’

무성한 하얀 수염으로 가슴을 묻고 있는 산신도 속의 노인과 눈을 맞추면 그 인자한 모습은 어쩐지 어린 양지를 무섭고 슬프게 했다. 그런 따위를 소원이라 품고 나를 찾느냐고 나무라며 호통을 치는 듯 아연 뒷덜미가 으스스해지기도 했다.

원두막처럼 작은 산신각은 예전이나 마찬가지로 조야한 언덕의 바위틈에 박힌 듯 서 있다. 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는 바라보기 아무래도 초라한 외양이다. 어머니는 안에 계신 신령님이 혹시 놀라시기라도 할까 저어하는 자세로 먼저 낮은 기침 신호를 보내며 산신각의 문을 열고는 했다. 벽면을 차지하고 그어진 가느다란 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면 하나의 인물 형상이 나타나 있던 기이한 초상. 거기 있는 소나무도 고풍스러운 향로를 든 동자도 찻물을 끓이는 동자도, 심지어는 호랑이를 안고 있는 수염이 긴 노인까지도 실선으로 희미하게 흔적만 드러나 있어 보고 있는 동안에도 눈앞에서 아슬아슬 모습을 감추고 말 듯 한 조바심을 느끼게도 했다.

산신각 앞 댓돌에 앉아 어머니가 나오도록 기다리는 지루하고 막막한 시간 양지는 생각 없이 먼산바라기를 했다. 자, 이거 무우라. 높고 낮은 산의 능선을 하늘과 편 갈라 가면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제단에 놓여있던 과자나 과일을 은밀한 손길로 쥐어주었다. 이거 묵으모 명 질어진단다. 낮게 소곤거리며 단발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어머니의 향연 배어있는 손길에서는 묵직하고 절절한 기원이 전해져 왔다.

양지는 산신각 문을 열지 않았다. 신으로 모시던 이가 사라진 이상 그곳은 퇴락하고 초라한 하나의 상징물일 뿐이었다. 신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존재하며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양지는 그 말에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양지의 생각을 부정하듯이 산신각 옆 바위벼랑 틈에는 촛불을 켠 흔적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