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5)
  • 경남일보
  • 승인 2016.11.2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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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5)

불을 붙이고 촛농을 흘리면 누군가의 기원을 담고 자신을 태울 자세로 꼿꼿하게 서있는 양초도 여럿 눈에 띄었다. 운두가 좁고 오목한 스테인레스 용기에다 물을 떠 놓은 곳도 있고 하늘을 향한 솟대처럼 비원의 향이 꽂혀있는 향로도 비바람 타지 않을 바위틈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이들은 부처님에게도 산신에게서도 버림받은 중생들인가. 아니면 부처님보다 산신님보다 더 강력한 신을 바라는 염원의 다른 형태인가.

가슴 뭉클하게도 용기에는 하나같이 기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강이찬. 동명렬. 안정만. 김동열…. 그릇에 새겨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무심히 읽어 나가던 양지는 뜻밖에도 가슴 저리는 현장 하나를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뚜껑이 기우뚱 벗겨져 있는 정화수 그릇과 향로, 그리고 타다 만 양초 세 자루. 거기도 예외 없이 꼭꼭 명문이 박혀 있다.



‘최 태복’ ‘소원성취’

양지는 자신도 몰래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다녀 간 흔적이었다. 어머니는 참 많은 신을 섬겼다. 집에서는 성주 신, 절에 오면 부처님, 외가에 가다가 만난 서낭당이나 돌무덤, 험상궂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색색의 헝겊이 꿰인 새끼줄을 두르고 있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정기나무 목신에게도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보름달을 보아도 새달 초승달을 보아도 온 누리에 새 빛을 뿌리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아도 어머니는 무조건 합장을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뿐 아니었다. 교회를 지나면 십자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성당 앞의 성모상에게도 언제나 인사를 했다. 식구들의 생일날도 두 손을 비볐고 농번기에 들밥을 먹게 되어도 잊지 않고 반드시 주문을 읊조리면서 고수레를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천지만물 앞에 죄인의 자세로 겸손하게 신들을 섬겼다.

양지는 문득 어떤 갈증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지성 깃들인 마음으로 어머니가 뜨는 순간부터 정화수가 되던 물. 절에서는 아직도 그 샘물을 사용하고 있을까.

그녀는 물이 증발되고 가랑잎 몇 개와 먼지만 채워져 있는 아버지 이름의 빈 정화수 그릇을 들었다. 산신각 아래로 비스듬히 샘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다. 다래와 머루넝쿨이 뒤엉켜있는 작은 둔덕의 오솔길을 넘으면 절에서 먹는 물로 쓰는 웅덩이라 기는 좀 작고 옹달샘이라 하기는 조금 큰 바가지 샘이 바위 밑에 있었다.

백중 무렵에 비가 오면 샘 아래의 너럭바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폭포에 물맞이를 하고 갈수기인 겨울에는 바위 밑에서 쫄쫄 흘러나오는 석간수를 감로수처럼 아껴가며 사용하는 거였다. 산이 낮기 때문에 날이 가물면 제일 먼저 식수 기근이 왔다. 그래도 부처님은 무심치 않으시어. 등 너머에 있는 이 약수를 마시는 사람들은 마치 부처님이 은근슬쩍 감추어 둔 영물을 발견한 듯이 자비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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