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96)
“단박에 화해가 될 끼란 생각 안 해. 외숙님은 동생이 온 줄도 모르시니 그냥 가도 돼. 나도 아무 말 안 할 거니 깨”
가까워지는 아버지의 기척에 쫓겨 양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뒤로 나가는 사잇문이 거기 있었다.
집 앞에서는 마중 나간 오빠와 아버지의 말소리가 어울리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영 푹한 게 천상 봄이구먼. 천지자연은 못 쎄기는 기라”
“그래도 아직 겨울인데요.”
오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커졌다.
“뭐 시간 맞차 약을 믹이라꼬 적어준 종이쪼가리가 있긴 한데 뭐 우짜란긴지 당최…”
검푸르게 짙은 향나무 가지 사이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오빠가 받아 갔는지 양손에 든 짐을 추스르며 불안정하게 구부정한 걸음이다. 겨울 옷 차림이 다소 둔하기는 해도 생각보다는 덜 피폐해 보인다. 누군가를 보호해야 된다는 책임감에서 나온 결기인가.
아버지의 여자가 젖먹이를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부인해도 그것은 현실이었다. 감기에 걸려 우유도 제대로 못 빨고 쌕쌕거리는 어린 것의 가쁜 숨결을 지켜 본 대책 없는 늙은 아비의 심정은 어땠을까. 설마 아버지가 어린 것을 끼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양지는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무슨 이유로 왜 이 길을 나섰는지도 모르겠는 거의 본능적인 동작만으로 걸음을 옮긴다.
“외숙님이 아이를 안고 엉거주춤 들어 서ㅤㅅㅣㅆ는디 하는 수 있어야제. 여관생활을 오래 권할 수도 없고”
“애를 젖 뗄 때까지는 키워주기로 했다면서요?”
“눈앞에 돈 있것다, 말이야 우선 뭐라꼬 몬하것노.”
“이 일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어요. 아버지는 사기를 당하신 거라구요.”
“어른이 고생하시게 된 걸 보면 잘됐다 할 수도 없지만, 새겨보면 또 굳이 못된 일도 아닌 것 같애. 어른이 그렇게 생기 있어 하시는 건 나도 만나고 나서 첨보거든.”
“지금 그 여자는 어디 있어요?”
“모르지. 내가 나서서 모들뜨기로 일 처리를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외숙님하고 외숙모님이 서로 말씀하시기 불편한 것만 중간에서 심부름한 것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외려 내가 조금 적극적으로 나섰을 걸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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