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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04)<164>의로운 시인 윤동주와 경남의 인연(5)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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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15  21: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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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는 광복이 되기 전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중 일제가 주는 살인주사를 맞고 하늘나라로 갔다.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동주의 장례식은 3월 6일 눈보라가 비뚤 비뚤 치는 날, 용정의 집앞 뜰에서 치러졌다. 연희전문 졸업 무렵 교내 잡지에 발표되었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장지는 용정 동산이었다.

단오 무렵에 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묘비를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크게 해 세웠다. 관련 앞뒤 내용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서 요약한 것이다. 이 부분은 너무나 눈물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연희전문 입학시험을 앞두고 그렇게도 의과를 가라고 했던 아버지, 문과는 배고픈 곳이고 겨우 기자나 잡지사 편집이나 하는 데로 가는 것이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아버지, 그럴 때 한동안 중재역을 맡아 주지 않고 침묵으로 아들의 주장에 동조하셨던 할아버지,이런 저런 설왕설래로 거울이 내던져지고 고함소리 내던져지고 마침내 참을 수 없어 일시 가출을 시도했던 윤동주,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는 중재역을 서되 “문과에서는 고시도 칠 수 있다니 그쪽으로 가는 것도 전혀 무망한 것은 아니란다!”라는 언급을 의지하여 동주의 문과대학 진학은 허락되었다.

그러던 분들이 엄혹한 계절 뼛가루로 돌아와 흙으로 묻히는 손자와 자식 앞에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그 ‘시인’을 비로소 인정했으니 어찌 그 장면이 예사로울 수 있겠는가. 어쩌면 슬픈 감동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동주도 눈을 편하게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뜻대로 들어가지 못한 전문학교, 그리고 도꾜의 릿교대학에다 교또의 동지사대학으로 이어지는 불효의 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대학의 선택 앞에서 얼마나 전전긍긍했을 것인가. 그런데 죽어서 동주는 ‘시인’이라는 이름 안에서 한 가족의 하자없는 사랑의 울타리 안으로 합류한 것이다.

이후 동주의 아버지 윤영석(1895~1962)은 동주의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넓혀주기 위해 일단 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광복 이듬해(1946.6)에 단신 월남하게 했다. 윤일주는 당시 19세였고 북간도에서 의전을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형 동주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만나고 자료가 있는지 탐문했다. 물론 첫 번째 만남의 대상은 동주의 연희전문 두 해 후배인 정병욱이었다. 정병욱에게서 육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확인했고 연희시절 기숙사 3인방 강처중을 만났다. 강처중에게서 하숙에 남겨둔 책상과 책꽂이와 책과 일용품들을 인수했다.

만일 정병욱이 동주의 필사본 시집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오늘의 윤동주는 없었을 것이다. 정병욱은 일제말 학병에 끌려나갔다가 살아 돌아와 있었다. 학병제는 동주가 체포된 뒤인 1943년 10월부터 실시되었다. 정병욱은 학병에 가면서 지혜로운 조처를 취했다. 필사본 원고를 당시 부모들이 거주하고 계시던 하동 건너편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본가에다 맡겨두었다. 아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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