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 비선실세, 나라를 망치는 암세포이다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경일시론] 비선실세, 나라를 망치는 암세포이다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 경남일보
  • 승인 2016.12.2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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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3월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반정군은 상궁 김개시를 베었다. 반정을 일으킨 첫날 시급히 일개 상궁 한 사람을 죽이고 그 사실을 단일 기사로 실록에 기재해 놓은 이유는 김개시가 요즘 말로 광해군 정권의‘비선 실세’였기 때문이다.‘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개시는 선조의 사랑을 받았던 궁인으로 후계자 자리가 위태롭던 광해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야사이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독약으로 선조를 시해하는 참변이 김개시의 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요컨대 광해군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세를 진 인물인 것이다.

실록에는 광해군시대의 실권자 이이첨과 김개시의 공통점을 설명하는 글도 실려 있는데, 두 사람 모두 계략에 뛰어났고 입으로는 항상 명분을 말하며 정적들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달랐다는 대목도 있다. 인조반정 세력이 기록한 글이니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김개시가 이이첨에 버금가는 정권의 실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말엽, 비선 실세로 이름을 날린 인물은 진령군이다. 진령군은 고종 때 활동했던 무당으로 명성황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오군란 당시 진령군은 충주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를 찾아가 환궁하는 시기를 예언해 주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명성황후가 그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왔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깊이 믿고 의지했는데 두 사람은 날로 친숙하게 됐고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禍福)이 걸려 수령과 변장(邊將)의 자리가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아부해 수양아들로 삼아달라고 보채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종도 점차 진령군에게 빠져들었는데 신령의 힘을 빙자해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다는 죄를 받았지만 고종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기대와는 달리 진령군의 신통력은 자신들과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됐고 고종은 망국의 군주가 됐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주술과 예언으로 길을 찾으려 한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그것으로 국정의 방향을 결정하려한 것은 국가의 공적 기능을 마비시킨 중대한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시대는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많은 비선 실세들이 있었다. 후궁, 내관, 종친 등이 왕의 그림자가 돼 국정에 개입했고, 권세가의 친인척들이 사사로이 권력을 휘둘렀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순간 아첨꾼들이 들끊게 되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무리들이 횡행하게 된다. 더욱이 이 과정이 은밀하게 이뤄진다는 점에서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권세가들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나라에 끼친다.

권세가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지위에 있기 때문에 언행이 쉽게 드러나고 견제와 비판도 작동할 수 있지만 비선 실세가 저지른 잘못은 심각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의 중요한 일이 투명하고 공개적인 절차가 아니라 밀실에서 결정되면서 나랏일의 권위와 신뢰는 상실된다. 국가시스템은 무너지고 공직자는 의욕을 잃는다. 더구나 이들이 다루는 일은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비선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책임한 권력이 바로 비선 실세의 특성이고 나라를 망치는 암세포이다.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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